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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호 기자의 문학터치 <135> 십 년째 열어젖히는 ‘시가 있는 아침’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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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한국인이 얼마나 시를 위하는지 단박에 보여주는 예가 있다. 해외 문학행사에 참가한 한국 시인이 외국인 앞에서 으스대며 꺼내는 상용 어구다.

‘한국은 매일 신문에서 시가 연재되는 나라다’.

이때 그네들 표정에서 ‘설마’가 읽힌단다. 미세한 동요를 읽은 시인, 내처 한마디 얹는단다. ‘한국은 매일 신문사설 옆에 시가 실리는 나라다’. 그러면 이내 비명이 터진단다. “Oh, my God!”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사설 옆에 시를 내다 거는 신문. 그래, 중앙일보다. 중앙일보의 ‘시가 있는 아침’(이하 시아침) 얘기다. 신문에서 시를 읽는 게 외국에선 별스러운 일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에겐 습관처럼 굳어진 지 오래다. 시아침은 십 년째 장수하는, 중앙일보의 간판 연재물이다. 말하자면 시아침은, 시 한 수 인용하고 단장(斷章) 늘어놓는, 시방 유행처럼 번지는 ‘시 에세이’의 원조다.

첫 주자는 고은 시인이었다. 고은은 1998년 1월 2일부터 꼬박 2년간 시아침을 맡았다. 미국으로 연수 간 99년에도 쉬지 않았다. 이어 이근배가 1년을 진행했고, 다음부턴 시인마다 두 달에서 넉 달간 담당했다. 지금의 박형준까지 시인 36명이 참여했고, 3100여 편의 시가 소개됐다. 마종기·정진규·천양희·유안진·문정희·곽재구·이시영·이성복·최승호·정호승·김기택·이문재·나희덕·문태준 등 한국 시단을 대표하는 면면이 날마다 시로써 아침을 열었다.

비평가 김화영도 시아침을 썼다(2001년 11월∼2002년 2월 연재). 시인 필자 원칙을 어긴 건 아니다. 김화영은 63년 신춘문예로 등단한, 엄연한 시인이다. 필자 중에서 고인도 생겼다. 2001년 9∼10월 필자 김영태는 지난해 7월 12일 별세했다. 시아침은 시인이 들려주는 시 이야기다. 그러나 예외도 있었다. 99년 1월 23일, 고은은 황석영의 짧은 글 ‘동자꽃’을 인용했다. 방북 이후 십 년 만에 귀환한 황석영의 소회를 전하며 고은은 ‘누군가 이 들꽃에 곡을 붙여 두루 눈물겹기를 바란다’고 적었다.

짬짬이 마련한 특집은 반응이 뜨거웠다. 2005년 5월 동시 특집을 기획했고, 그해 12월엔 사랑시로 한 달을 꾸렸다. 이듬해 12월부터 두 달간은 정끝별이 ‘밥시’만 발라 놓았다. 모아놓고 보니 한국 시엔 먹는 얘기가 유독 많았고, 한국 시에서 먹는 얘기는 유독 서러웠다.

시아침엔 열혈 매니어가 허다하다. 뼈아픈 일화를 공개한다. 이태 전 이정록 시인의 ‘의자’가 시아침에 실린 아침. 한 어르신이 전화로 다그쳤다. 그는 이 작품이 2004년부터 네 번째 실렸다며, 꼬박꼬박 날짜를 짚었다. 어떻게 아시냐 물었더니, 연재 첫날부터 따로 모아두고 있다고 대답했다.

이른바 ‘시아침 중독자’는 어르신 말고도 여럿 더 된다. 일일이 전화를 받아봐서 안다. 자신도 시를 쓴다며 자기 작품을 싣고 싶다는(이따금 실어야 한다는) 제보 전화도 수시로 걸려온다. 그러고 보니 그 어르신, 언제부턴가 연락이 없다.

어찌 보면 우리에게 유난스러운 데가 있는 거다. 당장 일본만 해도, 시는 극소수 동인의 고상한 취미쯤에 그친다. 우리는? 지난해에 현대시 100년이라며 연중 시끄럽더니 올핸 현대시 100주년이라고 다시 잔칫상을 차리는 참이다. 우리만큼 시 떠받들고 사는 민족도 드물다.

다시 십 년 전. 중앙일보 1월 1일자 1면에 다음 기사가 실렸다. “각박한 일상의 숨통을 터줄 ‘詩가 있는 아침’과 함께 넉넉한 하루를 여시기 바랍니다.” 그래, 어떠신가. 조금이나마 넉넉해지셨는가.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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