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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뮤지컬 무대에 정이 흐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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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아트홀에서 공연 중인 ‘소리도둑’은 로커인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이로 인해 충격을 받아 언어 장애를 갖게 된 딸 아침이의 스토리다. [크레디아 제공]

황순원 원작의 뮤지컬 ‘소나기’는 아이돌 그룹 ‘빅뱅’의 멤버 승리의 출연으로 더욱 화제가 되고 있다. [서울시뮤지컬단 제공]

화사한 봄을 알리는 3·4월, 창작 뮤지컬 동네에도 봄꽃처럼 따스한 정서가 감돈다. 한국식 ‘정(情)’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중·소극장을 중심으로 공연되고 있기 때문이다.

장유정의 신작 ‘형제는 용감했다’, 업그레이드된 추민주의 ‘빨래’, 조광화의 ‘소리도둑’, 서울시뮤지컬단의 ‘소나기’ 등이 그 주인공들이다.

이렇다 할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 ‘소나기’를 제외하고, 다른 세 작품은 인물 사이에 단절되었던 소통이 회복되면서 갈등이 해소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우연히 발견한 어머니의 일기장을 통해 오해를 푸는 형제(형제는 용감했다)와 솔롱고의 ‘언어’를 배우며 그를 진심으로 이해하는 나영(빨래), 그리고 잃었던 ‘노래’를 되찾아 결국 아침이와 대화하는 인경(소리도둑)은 모두 타자와의 소통을 재개하면서 삶의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이들의 소통을 정작 가속화시키고 갈등 해소에 박차를 가하는 것은 작품 속에 내재된 ‘정’이란 정서다. 이주 노동자로 차별받던 솔롱고가 우리 특유의 ‘정’ 문화에 힘입어 작품 속 세계 안으로 자연스럽게 편입되는 마지막 장면이 대표적인 예다. 아침이의 청각과 말을 찾아 주기 위해 생뚱맞아 보이는 ‘뮤지컬’ 한 대목을 어설프지만 열심히 공연하는 촌동네 아저씨·아줌마들의 노력도 비슷하다.

우리 시대에 상실된 소박한 사람살이는 회복되어야 할 본연의 삶의 모습인 것이다. ‘형제는 용감했다’의 대사를 빌리면, 진짜 보물은 로또가 아니라 마음의 진정성이라고 해야 할까.

이런 정서는 ‘로맨틱 코미디’ 계열로 채워지던 중·소극장 창작 뮤지컬의 과거 경향과 크게 다르다. 아슬아슬한 남녀 간의 로맨스 대신 가족 간의 애틋함이나 타자와의 연대가 재현되고, 그것은 눈물을 닦으며 공감하는 관객의 반응으로 완성된다. ‘소나기’조차 한없이 맑은 10대의 첫사랑을 그리고 있어서, 가슴을 졸이고 숨죽이며 지켜보는 연애장면은 찾아보기 힘들다. 더욱이 ‘소나기’는 과거의 향수에 사로잡힌, 성인이 된 ‘소년’의 관점에서 각색됐다. 그에게 과거란 한없이 낭만적인 시간이다. 그의 과거를 구성하기 위해 뮤지컬에서 새로 탄생한 형과 어머니, 그리고 학교 친구들도 영원히 그리운 대상들로 ‘저만치’ 존재할 뿐이다.

‘정’을 매개로 시골의 정취를 자아내든지, 혹은 과거로 회귀하든지간에 지금 시도되고 있는 창작 뮤지컬들의 움직임은 분명 ‘로맨틱 코미디’를 벗어나 스타일의 외연을 넓힌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그러나 동시대의 대중문화를 보면, 창작 뮤지컬의 현주소가 드러난다. 현재 TV드라마나 영화에서 사극의 퓨전화는 이미 구물처럼 여겨질 정도며, ‘미드’에 못지않은 추리극을 만들기 위해 분투 중이고, 실화를 근거로 한 연쇄 살인범과 부패한 전직 형사의 예측불허의 미스터리가 영화팬을 붙잡고 있다. 이러한 예들은 작품의 질적인 성과를 떠나, 확장된 서사와 대중의 예상을 뛰어넘는 상상력만으로도 높이 평가되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작금의 창작 뮤지컬 흐름에 대해 박수를 보내면서도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창작뮤지컬이 다른 대중문화 코드에 비해 대중의 취향을 반영하는 점에서는 한참 뒤처지고 모자라기 때문이다. 부담스럽지 않은 시골의 정취나 과거 회귀식 정서에 매달리는 것이 지난해 야심찬 기획이 처참한 실패로 돌아간 데에 대한 반작용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제작의 ‘안정성’을 최우선의 요건으로 삼아 ‘정’의 정서로 대중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단견이 아닐지. 창작 뮤지컬의 새로운 시장은 대중을 자극하는 상상력을 향해 열려 있을 때만 가능하다. 과거로의 퇴행은 더욱 발목을 잡을지도 모른다.

최승연(뮤지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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