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광복50돌의 새로운 다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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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강산(江山)도 변한다는 10년 세월이 다섯번이나 흘러간 지난半세기,놀랍게도 韓日관계는 크게 바뀐 게 별로 없다.「유감(遺憾)」또는 「통석(痛惜)의 念」수준에 머무르는 저들의 과거 반성 말솜씨도 그러하지만 우리의 이중성(二重性)도 여전하다.
우리는 일본에 대해 우월감과 열등감을 공유하고 있다.세계 어느 곳이든 인접국가들간에는 전쟁과 평화를 주고 받으며 애증(愛憎)의 골이 깊게 패어 있음을 본다.그러나 韓日 사이에는 독특한 두가지 대목이 있다.
첫째로 근대화 이전 일본문화의 원형이 상당부분 한반도에서 흘러간 것이라는 점,둘째는 유례없이 가혹했던 일제(日帝)식민지를기억하고 있는 세대가 아직도 생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가해자인 일본은 고대사를 변조.왜곡하고 식민통치의 수탈행위보다 근대화 공헌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다.
고대사 변조에 대해서는 고고학적 발굴연구와 역사 기록의 새로운 해석작업이 꾸준히 체계적으로 진행돼야 한다.여기서 유념해야할 것은 역사관계의 상대성이다.
문명발상지 중국의 중원(中原)땅에서 본다면 그곳에서 한반도로흘러간 문물이 약간의 변형을 거쳐 다시 일본열도로 흘러간 자취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문화의 원형이 한국의 것임을 강조한다면 중원의 주인공들은무엇이라 할 것인가.대일(對日)우월감은 대중(對中)열등감을 함축한다. 인류문명의 무게중심을 중앙에서 변방으로,변방을 새로운중앙으로 부상시키면서 역사는 역동적으로 전개돼왔다.중요한 것은원천 못지않게 창조적 수용이며 과거보다 현재와 미래라는 인식이다. 오늘 옛 중앙청 건물의 철거행사가 거행된다.일제보다 더 장기간 사용한 우리 정부의 역사현장이 사라진다.건물보존론자들도상당수 있건만 국민적 합의가 이뤄졌다는 일방적 주장에 외면된다. 불행한 역사의 자취일수록 지워버리는 것보다 절치부심(切齒腐心)의 상징물로 남기는게 낫다.또한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개칭된다.
광복 이후 국민학교에서 대한「국민」으로서의 반일(反日)교육이철저했지 일본제국「국민」교육은 전무했건만 일제 냄새가 난다는 것이 개칭 이유란다.그러면 일제 냄새가 어찌 그것 뿐인가.
여기에 우리의 이중성이 있다.우리는 근대적 법질서 속에 일상생활을 영위한다.한국의 육법(六法)전서를 들춰보면 일본 냄새 안나는 대목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일본의 법률체계도 따지고 보면 서양의 로마법전에 기원을 두고 있다.이것은 한국이 일본을 통해 받아들인 서구 문물의일부에 불과하다.
우리의 의식주 생활 구석구석에 얼핏 일본답지만 실상은 서구적인 요소들이 내면에 깊숙이 자리잡으면서 근대화가 진행됐다.언어생활에서도 과민할 까닭이 없다.영어처럼 외래어를 부단히 흡수해야 세계언어로 발달할 수 있다.
우리는 결코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사회,훈민정음(訓民正音)의시대로 되돌아갈 수 없다.
광복 50년,이제는 감상적 애국자들의 소아병적 발상으로부터 해방돼야 할 때다.韓日관계에도 장기적 안목에서 국가안보와 국익을 합리적으로 추구하는 냉정한 실용주의자들이 등장할 때다.미래를 바라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양국간에 새로운 차원의 경제관계를 수립하는 것이다.
지난 반세기에는 일본의 과거반성.청산에 호소해 자본.기술의 이전을 추진하는 것이 한국의 기본자세였다.
결과적으로 이는 한국의 고도경제성장에 기여하기도 했으나 수입원자재의 가공수출구조를 심화시켜 대일 무역수지의 적자폭만 늘리게 됐다.
지난날의 자세를 되풀이해 기술이전을 구걸하는 것은 이제는 한계에 이르렀고,양국간의 수직관계도 개선할 수 없다.
앞으로 수직관계를 수평관계로 전환하는 데는 우리측의 연구개발결과에 일본측 경제인들이 스스로 매력을 느껴 상호간에 전략적 제휴가 활발히 전개되도록 해야 한다.
최근 포철.삼성.대우.LG등 일부 대기업이 이러한 방향으로 변신하고 있음은 반가운 일이지만 아직 갈길은 아득하다.
일본은 배울 것도 많고 배우지 말아야 할 것도 적지 않은 나라다. 일본의 한국.중국등 이웃나라와의 과거 미청산 망언들은 세계 주도권 도전을 늦출 따름이다.
반면 우리도 과거청산 요구에만 집착한다면 정신적으로 일본을 넘을 수 없고,일본을 넘지 않고서는 세계 일류를 바라볼 수 없다. 〈서강대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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