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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 전 과학·인문학의 소통을 말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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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호 23면

바이오닉 맨, 리튬 이온 전지, 나노 구조, 대기압 플라스마, 구조 생물학, 클라우드 컴퓨팅. 이 중 그 뜻을 이해하고 간단하게라도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몇 개나 될까. 이런 단어를 아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하냐고 되물을 수 있다. ‘합리적 선택이론, 가스통 바슐라르, 포드주의, 그라마톨로지’ 같은 단어는 왜 포함하지 않았느냐고 불평할 수도 있다.

‘좋은 책 선정위원회’가 고른 新고전 <14> 『두 문화』

두 그룹의 단어를 얼마나 설명할 수 있는지는 문과 출신인지 이과 출신이지에 따라 극명하게 갈린다. 고등학교 때 수학을 좀 잘하는 것 같으면 이과로, 수학을 싫어하면 문과로 가게 한 허탈한 선택이 그 후로도 우리의 삶에 뿌리 깊게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수학·물리학·화학·생물학·천문학은 과학의 모든 분야를 담아냈다. 하지만 20세기 후반부터 과학은 분화되면서 동시에 융합하기 시작했다. 생명과학(BT)과 정보기술(IT)이 융합한 BIT, 나노과학(NT)과 IT가 융합한 NIT가 등장했다. 물리학자가 생명체의 본질인 단백질의 구조를 밝히는 방법을 제시하는가 하면, 안과 전문의가 엔지니어와 함께 인공 망막을 개발하고 수학자는 금융 상품을 개발한다.
사회 변화의 가속도가 커지고 사회경제적 구조가 급변하는 21세기에는 자신의 전문 분야는 물론 다른 분야에 대해서도 폭넓게 알고 있는 ‘T자형 인재’가 중요한 역할을 할 전망이다. 하지만 실상을 보면 일찌감치 문과·이과로 갈라진 뒤에는 상대편 분야를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같은 분야에서조차도 전공 영역이 세분화돼 의사소통이 어렵기까지 하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물론 사회의 발전에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는 커뮤니케이션 측면에서 이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시점에 찰스 퍼시 스노우의 두 문화는 현재, 나아가 미래를 그려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책은 저자가 1959년 케임브리지대에서 강연한 ‘두 문화와 과학혁명’ 내용을 엮었으며, 강연 후 제기된 비판과 논쟁에 대해 정리한 글과 스테판 콜리니의 해제(解題)가 실려 있다.

실험 물리학자, 고위 행정가, 소설가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는 저자는 낮에는 과학자들과 함께 지내고 밤에는 문학하는 동료와 어울릴 수 있었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과학적 문화와 인문학적 문화 사이의 단절이 심각하다고 이야기하면서 이것이 사회 발전에 치명적인 요인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엘리트 교육을 지나치게 일찍 시작한 영국의 ‘전문화 교육’을 비판한다. 소수의 순수 과학자만을 길러내는 영국 교육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제기하며 미국의 대중교육과 옛 소련의 응용과학을 강조한 모델의 장점도 설명한다.

책에서 저자는 두 문화 사이의 간극을 좁힐 실질적인 대안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또 인문학·과학 어느 쪽에도 분류되지 않는 사회과학을 포함한 다양한 응용학문에 대한 배려도 부족하다. 하지만 학과 사이의 엄밀한 구분, 상호 이해 부족, 다른 전문 집단에 대한 우월감이나 경멸을 문제점으로 지적한 것은 높이 살 만하다.

저자는 책에서 다양한 사례를 들어 두 문화의 간극을 이야기하면서 결국은 핵심 논제를 교육에서 찾는다. 그러면서 두 문화가 분리된 사고 패턴은 자유분방한 창조적 상상력을 약화시킨다고 이야기한다. 21세기에 필요한 것은 창의적 인재임을 고려할 때 저자의 주장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미래의 과학기술은 우리 생활 속에 깊숙이 자리 잡을 전망이다. 예를 들어 유비쿼터스 환경에서 개인의 일상생활, 학습, 직업 여건은 현재와 그 구조부터 다르다. 지금까지는 자연의 특성을 이해하고 원리를 밝혀 과학기술의 진보를 이끌어냈다면, 미래에는 인간 사고 구조의 패턴이 다른 환경에서 창의적 역량을 발휘해야 한다. 미래 시민은 이과나 문과 출신 여부에 상관없이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와 인간과 사회에 대한 통찰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