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發 전세계 테러 비상] 이라크 파병국 "남의 일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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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탄 테러가 발생한 스페인 마드리드의 아토차 역에서 지난 15일 한 어린이가 희생자를 추모하는 양초에 불을 붙이려 하고 있다. 이번 테러로 200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약 1500명이 부상했다. [마드리드 AP=연합]

스페인 마드리드 열차 폭파의 배후가 알카에다로 드러나고 있다. 그 덕에 갑작스럽게 집권한 스페인 좌파 정권은 유엔이 주도하는 체제로 바뀌지 않으면 오는 6월 말 이라크 다국적군에서 철군하겠다고 밝혔다. 아프가니스탄전에 참가했던 대부분의 유럽국가와 이라크 파병국 등은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미국과 영국 정부는 난처한 입장에 빠졌다. 우리는 과연 안전한 걸까.[편집자]

지난 11일 발생한 스페인 마드리드 열차 폭파사건이 유럽뿐 아니라 전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이라크 연합군 동맹 축에 균열=이라크 파병국들은 이제 미국의 눈치도 봐야 하고 알카에다의 자국 공격 가능성에도 대비해야 한다. 특히 미국과 영국에 이어 2000~3000여명의 대규모 병력을 파견한 폴란드와 이탈리아는 곤경에 빠졌다. 알카에다의 차기 공격 목표가 이 두 국가라는 분석이 이미 나왔기 때문이다. 독일의 '에센 테러연구소' 롤프 토프호벤 소장은 15일 "스페인 마드리드에 이어 폴란드와 이탈리아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다음 테러 대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아사히(朝日)신문 등 일본 언론들도 스페인의 이라크 철군 방침을 1면 톱기사 등으로 크게 취급했다. 사설은 "스페인 열차 테러사건이 정말 알케에다의 범행이라면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며 "현 이라크 정책이 야기하는 리스크를 직시하면서 국제 테러를 억제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책을 찾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스페인에 이어 철군의 '도미노' 현상이 발생할 가능성은 아직 크지 않다. 가와구치 요리코(川口順子)일본 외상은 15일 기본 방침에 변화가 없다고 강조했다. 폴란드의 러셰크 밀레르 총리는 "스페인이 병력을 철수할 경우 그만한 병력을 추가 파병해 공백을 메우겠다"고 강하게 스페인의 조건부 철군 결정을 비판했다. 이탈리아 정부는 국내 여론의 추이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나시리야에서의 테러공격으로 19명의 자국군 병사가 사망한 이후 강력히 제기됐던 국내 시민단체들의 철군 요구가 다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이로 아메리칸대학 정치학과 왈리드 카지하 교수는 "알카에다가 이번 사건을 주도했다면 '확실한 승리'를 거두었다"고 말했다. 교수는 "만약 오는 11월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이 패배할 경우 이라크 연합군 체계가 붕괴될 수도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도 배제할 수 없다"고 전망했다.

◇유럽의 합종연횡=스페인 열차 폭파사건으로 유럽의 세력 균형에도 변화가 일고 있다. 스페인의 새 정부 수반이 될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사파테로는 총선에서 승리하자마자 대외정책의 기조를 미국 편에서 유럽 편으로 돌리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는 총선 승리가 확정되자마자 "토니 블레어와 조지 W 부시는 자기반성과 성찰을 해야 한다…새롭고 커진 유럽연합의 탄생을 위한 합의를 조속히 이뤄내야 한다"고 말했다.

9.11 이후 지금까지 유럽은 미국-영국-스페인을 축으로 한 참전파와 프랑스-독일을 축으로 한 반전파로 나뉘어 왔다. 부시 대통령은 전쟁을 논의할 경우 블레어 영국 총리를 불러 숙의하고, 블레어는 곧바로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 스페인 총리를 찾아가 입장을 조율하는 협의방식을 취해왔다. 세 정상이 대서양의 작은 섬에서 회동한 다음날 이라크전이 터졌다. 그 같은 삼각동맹 위에 이탈리아와 폴란드가 적극 참전했다. 그러나 이제는 프랑스.독일 중심의 반전 쪽으로 세력균형이 기울게 되는 셈이다.

스페인의 변신은 유럽연합(EU) 통합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EU의 새 헌법을 만드는 과정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나라가 바로 스페인과 폴란드였다. 두 나라가 기존에 합의된 투표권이 다소 축소되는 새로운 의결방식에 반대해 새 헌법 통과를 저지해 왔다. 그런데 스페인이 자신의 지분 축소를 감수하더라도 EU 통합에 적극 나서겠다고 나온 것이다.

◇영국의 고민=영국 언론들은 스페인 폭발사고 직후부터 '다음은 우리 차례?'란 경고 메시지를 대서특필하고 있다. 영국은 유럽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이라크 전쟁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내년 봄 영국에서도 총선이 예정돼 있다. 알카에다가 스페인의 성공처럼 영국에서도 테러를 통한 정권교체를 노릴지 몰라 블레어 정부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런던.베를린.파리.도쿄.카이로=오병상.유권하.박경덕.김현기.서정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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