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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중국문화지도 <19> ‘하나의 중국’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종교 인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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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중국 4대 명찰로 꼽히는 지난(濟南) 영암사의 사리탑 모습. 창건 당시인 당나라때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중국 취푸(曲阜)시의 공묘의 대성전. 공자를 모시는 곳으로 전각의 규모가 굉장하다<上>. 베이징에서 가장 큰 라마교 사원인 용화궁에서 불자들이 향을 피우고 기도를 하고 있다. 중국의 불교 신자들은 기복적 성향이 무척 강하다<下>.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다. 사람들은 궁금해한다. 중국에도 종교가 있을까.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중국 인민들은 종교를 어떻게 믿고, 바라보고, 또 생활하고 있을까. 사회주의와 종교의 동거는 과연 가능한 것인가. 21세기 중국은 종교를 견제하면서 동시에 종교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21세기 중국문화지도가 중국의 종교를 들여다봤다.

#장면1 : 1850년대 중국 청나라 말기였다. 아편 전쟁 직후라 세상은 어수선했다. “내가 바로 예수의 동생이다. 그가 환생한 게 나다”라며 홍쇼우진(洪秀全)이 난을 일으켰다. 바로 ‘태평천국의 난’이다. 그들은 서양의 기독교 사상을 끌어들였다. 난징(南京)에다 태평천국이란 나라도 세웠다. 홍쇼우진은 자신을 ‘천왕(天王)’이라 칭하고, 난징을 ‘톈징(天京)’이라 불렀다. 이들은 십수년간 나라를 유지했다.

#장면2 : 명·청나라 때 ‘백련교도의 난’이 일어났다. “천상의 미륵불이 내려와 지상에다 극락세계를 세운다”고 주장했던 종교적 비밀결사체인 백련교가 일으킨 난이다. 이들의 세력은 약해빠진 청나라 관군을 압도했다. 청나라는 이 난을 진압하느라 약 1억냥의 재정을 지출, 결국 국가재정난에 빠지고 말았다.

#장면3 : 이에 앞서 백련교는 원나라 말기에 ‘홍건적의 난’을 일으켰다. 머리에 붉은 두건을 둘렀던 홍건적은 ‘미륵불’을 내세웠다. 종교적 성격이 무척 강한 대반란이었다.

#장면4 : 후한 말기였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다. 이들을 토벌하기 위한 연합군 대장이 『삼국지』에 등장하는 동주어(董卓·동탁)다. 황건적의 정신적 기반은 ‘도교’였다. 이들은 “천하가 태평시대를 연다”며 도교의 원류인 ‘태평도’를 내세웠다. 이 ‘태평도’가 남북조 시대를 거치며 도교라는 종교로 자리를 잡았다.

이처럼 중국 역사의 고비마다 대반란이 있었다. 또 그런 난들마다 ‘종교적 배경’이 깔려있다. 게다가 중국에는 56개에 달하는 소수 민족이 있다. 그래서 중국 정부는 현실적으로, 역사적으로, 경험적으로 ‘종교’와 ‘정치’의 만남을 견제한다. 하나의 중국, 즉 ‘원 차이나(One China)’를 위협하는 ‘씨앗’으로도 보기 때문이다. 최근에 불거진 티베트의 독립 요구 시위에 대한 중국 정부의 태도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중국의 종교를 중국식 사회주의와 떼어서 볼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난해 11월 20~28일, 중국 정부는 7대 종단으로 구성된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 단장 최근덕 성균관관장) 대표단을 초청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한-중 양국의 종교계 교류를 강화하자는 취지도 있었다.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이하 정협) 왕충위(王忠禹) 부주석이 일행을 맞았다. 그는 당내 실력자로, 파격적인 환대였다.

KCRP 최근덕 단장은 “주장과 교리를 달리하는 한국의 7대 종단 대표가 중국을 방문했다. 우리는 ‘다름이 아름답다’는 전제 하에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 인정 하에 평화를 누리고 있다”고 인사말을 건넸다.

이에 정협 측은 중국식 사회주의와 종교의 ‘동거’를 말했다. 왕 부주석은 “중국의 도교와 유교에도 ‘다름이 있기에 아름답다’는 얘기가 있다”며 “우리는 중국적 특색이 있는 사회주의와 종교의 조화를 지향한다”고 답했다.

중국 정부는 5대 종교를 인정하고 있다. 불교와 도교, 개신교, 천주교, 이슬람교다. 그밖의 종교는 인정되지 않는다. 또 중국에서 개인적 종교 활동은 보장된다. 그러나 타인에게 종교를 강요하는 행위는 불법이다. 그래서 중국내 ‘선교 활동’은 법으로 금지돼 있다. 다만 유교는 중국에서 종교가 아니다. 사상과 생활문화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중국이 ‘종교’에 눈을 돌린 건 얼마 되지 않았다. 1966~76년 대륙을 휩쓸었던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홍위병들에 의해 숱한 사찰과 사원이 불에 타버렸다. 공자묘 주위에 있던 비석도 반토막이 날 정도였다. ‘타도공가점(打倒孔家店·공자를 타도하자)’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승려도 대부분 이 시기에 환속을 당했다. ‘절을 관리하라’는 지시로 남은 일부 승려, 산 속으로 숨어든 일부 승려를 통해 이름뿐인 명맥을 유지할 뿐이었다. 이 시기 중국에서 종교는 철저한 ‘타도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문화대혁명이 막을 내리자 78년 ‘북경의 봄’이 왔다. 중국인들은 그제야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전통과 문화’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며 문화열은 더욱 고조됐다.

2001년 관료를 양성하는 보수적인 중국 인민대학에 공자의 동상이 섰다. 아울러 장쩌민 국가주석이 ‘이덕치국(以德治國)’을 선언했다. 법가에서 쓰는 ‘이법치국(以法治國)’이란 문구를 유가의 ‘이덕치국’으로 바꾼 것이다. 함께 중국을 방문한 성균관대 유학과 김성기 교수는 “그건 중국 정부가 노선을 바꾼 걸 의미한다. 유교를 사회주의 건설의 파트너로 받아들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유가 있었다. 김 교수는 “중국은 갈수록 시장경제화하고 있다. 또 중국 정부는 소수 민족의 분열을 막기 위한 설득력을 갖추려 한다. 그런데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로는 이제 한계에 온 것 같다. 충성과 효, 현세적 윤리를 말하는 유교가 합당한 보편성을 가졌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말했다.

날로 발전하는 중국의 경제력은 여기에 ‘기름’을 붓고 있다. 최근 상하이와 광저우, 항저우 등지에선 불교 신자가 부쩍 늘고 있다. 도교 사원을 찾는 이도 늘었다. 또 교회와 성당을 찾는 이도 증가 추세다. 오히려 성직자들이 부족한 실정이다.

중국 최대의 목조불상인 보녕사 천수천안관세음불. [중앙포토]

그런데 중국 정부는 ‘하나의 중국’에 대한 위협에는 단호했다. 중국종교인평화회의(CCRP) 고위 관계자는 KCRP와 만나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세계에는 오직 하나의 중국만 있다. 달라이 라마는 종교계 인사가 아니다. 종교라는 명목을 내걸고 조국의 통일을 저해하는 정치적 인사일 뿐이다”고 말했다. ‘중국이 바라보는 티벳’이 이 말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중국 전통 수련법의 일종인 기공을 수행하는 단체인 ‘파룬궁’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한때 중국내 파룬궁 수련자는 8000만 명, 전 세계적으로 1억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기도 했다. 파룬궁은 불교와 도교의 교리도 일부 차용하고 있다. CCRP 고위 관계자는 “파룬궁은 종교 조직이 아니다. 이들은 정상적인 종교활동을 저해하는 정치 조직이다. 중국 정부의 파룬궁 타파는 광범위한 중국 인민의 지지를 받았다”고 강조했다.

개방 이후 중국은 빠른 속도로 시장경제화하고 있다. 또 중국 정부는 ‘통일 중국’을 유지할 ‘통일 정신’을 모색 중이다. 그래서 종교가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나 ‘하나의 중국’에 대한 위협에는 단호하다. 종교도 그 테두리 안에서 용인된다. 중국 정부는 종교와 정치의 만남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베이징 글·사진=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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