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위기의 민주당 정체성부터 찾아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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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민주당이 총선에서 얻은 81석은 야당으로서 최악의 참패다. 지난해 대선 상황을 지금과 비교해 ‘그만하면 됐다’는 얘기도 당내에 있는 모양인데 위기 인식이 그 정도인가 묻고 싶다. 정치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가 아니다. 현재의 상대적인 세력 관계다. 여야 의석 격차가 지금처럼 벌어진 적은 없었다. 3당 합당의 위력과 야당 존립의 위기감 속에 치러진 1992년 총선에서조차 야당은 97석을 건져냈다.이번 총선에서 민주당은 ‘일당 독주 견제론’을 외쳤다. 그런데 민심은 견제의 역할을 민주당보다 한나라당의 박근혜씨한테 맡긴 것 같다. 쪼그라질 대로 쪼그라진 민주당은 200석가량의 보수세력 헤게모니가 성립한 신정치체제에서 까딱 잘못하면 존재감마저 위협받게 됐다.

민주당에 표가 안 간 것은 이른바 ‘잃어버린 10년’ 국정 실패 세력을 혼내주겠다는 민심 때문이다. 대선에서 일은 안 하고 토론만 하는 나토(NATO : No Action Talk Only) 정권, 퍼주기에 능하고 만들기에 무능한 진보, 현실을 외면하는 이념정치를 심판한 민심이 이번 총선에도 이어졌다. 당 이름도 바꾸고 당 대표도 바꿔봤지만 유권자의 눈은 바뀌지 않은 것이다.

민주당은 이제 생존을 위한 본질적 질문을 던져야 한다. 제1 야당의 정체성을 무엇으로 가져가야 할까. 유권자는 제1 야당 민주당의 실체를 알고 싶어 한다. 손학규 대표는 개인적으론 선거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보수적인 선진 이념’과 ‘진보적인 평화주의’의 혼합 브랜드였다. 한나라당 출신으로 민주당 대표를 맡은 것도 정체성의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민주당은 어떤 노선으로 갈 것인가. 보다 진보 쪽이냐, 보다 보수 쪽이냐. 아니면 손학규의 혼합 브랜드를 보다 정교하게 다듬을 것인가. 세계화와 잃어버린 10년의 영향으로 한국 사회가 전반적으로 보수로 이동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이런 현실에서 제1당과 2당의 이념적 거리를 좁히는 노선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창조한국당이나 민주노동당·진보신당 등과 새로운 진보의 길을 모색하는 것은 또 다른 방법일 수 있다.

쇠락한 간판 스타를 대체할 세력이 누구인가도 민주당이 풀어야 할 숙제다. 이는 당의 정체성과 직접 연관이 있다. 민주당은 진보 노선의 원천이랄 수 있는 김근태·손학규·정동영·이해찬·한명숙·유시민씨가 모두 졌거나 탈당했다. 386 출신들도 무더기 낙마했다. 민주당은 리더십 백지 상태가 됐다. 백지에 어떤 리더십을 그려 넣을 것인가. 총선 결과 민주당엔 중도적이거나 실용적 인사들이 상대적으로 늘어났다. 이들이 세력을 형성해 당을 이끌어 갈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박상천 대표 같은 구민주당 지역세력이나 이번 총선에서 세를 유지한 친김대중 세력이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 민주당의 운명은 정체성을 분명히 하라는 이런 질문들에 어떤 답을 하느냐에 달려있을 것이다. 잘못된 답을 내게 되면 지리멸렬, 당의 소멸을 가져올 수 있다. 민주당 사람들이 치열하고 집중적인 토론으로 새롭게 부활하기 바란다. 참패의 충격을 딛고 정체성 논쟁에 불을 붙여야 한다. 왜 국민은 범보수 세력에게 3분의 2의 의석을 몰아 주었으며, 이러한 지형에서 민주당이 살아남을 길이 무엇인지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 좁은 지역주의에 매달릴 수 없다. 그렇다고 과거의 진보로 돌아갈 수도 없다. 민주주의엔 건강한 야당이 필수적이다. 그 야당의 역할을 재정립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