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이 한국에서 처음 듣고 배우는 말이다. 한국은 ‘빨리빨리’ 덕에 단숨에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변신에 성공했지만 그 부작용도 컸다. 많은 사람이 ‘속도의 노예’가 되어 산다. 입시도 취업도 전투가 됐다. 오랜 미덕이었던 훈훈한 정과 남을 위한 배려는 이젠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하지만 예외가 있다. 지난해 말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로 지정된 전남 완도군 청산도다.
이삭 패는 청보리밭
영화 ‘서편제’에서 가장 명장면으로 꼽히는 진도아리랑 장면(5분40초). 원래 그렇게 길게 찍을 계획은 아니었으나 임권택 감독이 장소가 너무 좋아 바꿨단다. 푸른 바다, 푸른 산 그리고 붉은 황톳길이 어우러진 이 명장면의 무대가 바로 전남 완도군 청산도다.
이탈리아인들이 눈여겨본 것
당리 돌담 길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름다운 풍경만이 아니다. 청산도 사람들의 풋풋한 삶도 엿볼 수 있다. 따가운 봄볕 아래서 김을 매는 아낙들, 이른 아침 지게를 지고 돌담길을 걸어가는 촌로, 털털거리는 경운기를 타고 구들장 논으로 향하는 노부부…. 하나같이 느리게 살아가는 모습이다. 지난해 가을 이곳을 찾은 이탈리아 치타슬로(슬로시티) 협회 실사단도 이 모습에 주목했다. 로베르토 안젤루치 치타슬로 회장은 “청산도의 치타슬로 가입을 확신하게 된 것은 콩밭에서 일하는 주민과 물질하고 나온 잠녀들의 감사하고 기뻐하는 눈빛 때문”이라고 말했다.
청산도는 어업보다 농업의 비중이 더 높다. 주민 80% 이상이 농업에 생계를 의존한다. 그런데도 트랙터나 경운기가 별로 없다. 소로 쟁기를 끌어 밭을 갈고, 손으로 콩을 수확한다. 콩 타작도 도리깨로 한다. 반듯하게 정리된 논도 없다. 산비탈을 일궈 만든 다랑논과 논바닥에 돌을 깔고 흙을 덮은 구들장 논이 전부다. 화학비료 대신 퇴비를 쓴다. 소는 ‘당연히’ 사료 대신 여물을 먹는다. 자운영이 활짝 핀 구들장 논은 양지리와 부흥리에 많다. 구들장 논은 땅과 흙이 귀한 청산도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형태의 논. 바닥에 넓은 돌을 구들처럼 깔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만들었다. 구들을 깔 때 수로도 만든다. 위 논에서 사용한 물을 아래 논에서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쌀 한 줌이라도 더 얻기 위해 청산도 사람들은 대대로 이 고된 노동을 감수해 왔다.
문화재가 된 돌담 길
청산도의 조형미는 밭과 집을 둘러싼 돌담에서 정점에 이른다. 청산도의 돌담은 땅을 개간하면서 나온 돌들을 쌓아 올려 만들었다. 언뜻 보면 쌓다 만 듯 엉성하다. 멋을 내기 위해 만든 육지의 돌담과는 사뭇 다르다. 돌담은 서로 이어져 정겨운 고샅길을 만든다. 사람들은 그 길을 무시로 드나들며 순박한 삶을 이어왔다.
돌담이 가장 멋스러운 마을은 상서리.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하지만 상서리 돌담도 딱히 조형미가 뛰어나거나 건축학적으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섬사람들의 삶의 흔적이 짙게 배어 있을 뿐이다. 삶이 곧 문화이므로 굳이 조형미를 들먹일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이곳 돌담은 곧은 구간이 채 10m도 안 될 정도로 구불구불하다. 몇 발짝만 걸어도 느닷없이 가족이나 이웃과 만나게 된다. 상서리 사람들은 이 돌담 안에서 소와 함께 살아 왔다.
천천히 사는 법을 배우고 싶거든, 당장 청산도 가는 배를 타고 볼 일이다.
Tip
■ 청산도는 작은 섬이라 한나절이면 대충 다 둘러볼 수 있다. 하지만 청산도의 속살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하루쯤 묵는 것이 좋다. 모텔과 민박집이 30여 곳 있다. 주말에는 관광객이 몰리므로 예약을 해야 한다. 숙박료는 3만원 선. 청산면사무소(061-550-5608)와 청산농협(061-552-9388)에 문의하면 교통편과 숙소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 드라마 ‘봄의 왈츠’ 세트장인 왈츠하우스(사진
중앙일보, 문화체육관광부, 한국관광공사 공동 캠페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