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배명복시시각각

민성은 천성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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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어제 하루 망설인 사람이 나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유권자의 신성한 권리를 포기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투표를 하자니 딱히 마음 줄 곳도 없고, 여간 고민스럽지 않았다. 그래도 투표소를 찾아 흰색과 연두색 용지에 기표를 하고 나오긴 했지만 안 내키는 물건 억지로 산 것처럼 기분이 영 찜찜했다. 기록적으로 낮은 투표율을 보인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하다.

다원주의는 민주주의의 기본조건이다. 그럼에도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보니 결국 ‘견제냐 안정이냐’는 정략적 구호에 농락당하고 만 느낌도 들었다. 지명도나 인기에 좌우될 가능성 또한 어느 때보다 컸다. 내가 찍은 한 표가 내가 원하는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믿기 어렵다는 회의와 좌절감이 지배한 선거였다.

무엇을 어떻게 할지는 안중에도 없고, 무슨 수를 쓰든 일단 되고 보자는 속셈이 뻔히 들여다보인다.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고, 당선되고 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유권자는 싹 잊어버리고, 다시 그들만의 게임에 몰두할 것이다. 정당과 정파의 졸개와 하수인이 되어 서로 싸움박질이나 벌이며 이합집산을 거듭할 게 뻔하다. 이런 불길한 예감 앞에 한숨을 쉰 사람이 어디 한둘이었을까.

막스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정치인에게 필요한 자질로 세 가지를 꼽았다. 정열·통찰력·책임감이다. 나는 그보다 소통 능력과 겸손함이 우선이라고 믿는다. 계파의 보스가 아니라 대중과 소통하는 능력, 대중의 눈높이로 자신을 낮추는 겸허함 말이다. 정치인에 대한 불신의 뿌리는 국민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국민의 ‘소리 없는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는 데 있다고 본다.

민심을 따르면 흥하고, 거스르면 망한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다. ‘하늘은 백성의 눈으로 보고, 백성의 귀로 듣는다(天視自我民視 天聽自我民聽)’는 『서경(書經)』의 가르침이다. ‘민성(民聲)은 천성(天聲)(Vox Populi, Vox Domini)’이라는 말은 로마제국의 금언이다. 마키아벨리는 “민중은 군주보다 항상 현명하다”고 했다. 관청(官廳)의 ‘청(廳)’은 본래 ‘듣는 집’이란 뜻에서 유래했다. 백성은 어리석고, 변덕스러운 ‘중우(衆愚)’라고 생각하는 정치인의 실패는 예정된 코스다.

언론에 투영된 민심이 ‘조중동’의 농간(?) 때문에 믿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정치인이 있다면 얼마든지 다른 수단을 찾을 수 있다. 과학적 기법에 근거한 여론조사도 있고, 인터넷도 있다. 네티즌과의 소통을 통해 민심의 동향을 살필 수 있고, 민심을 직접 수렴할 수도 있다. 민심을 헤아리기 어려워 듣고 싶어도 못 듣는다는 핑계는 통할 수 없다.

고향인 봉하마을로 내려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운영 중인 인터넷 사이트, ‘노무현의 사람 사는 세상’은 이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있다. ‘웹2.0’을 기반으로 시민주권시대를 연다는 것이 그가 표방하고 있는 목표다. 사회적 이슈에 대한 자유로운 소통을 통해 집단 지혜를 모으고 확산시킴으로써 기성 언론을 뛰어넘는 새로운 담론의 장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국회의원 한 명 한 명이 다 헌법기관인데 그들이라고 못할 것은 없다.

올 초 서울에서 열린 한국-프랑스 포럼 참석을 위해 방한한 프랑스 국회의원 3명을 만나고 느낀 바가 있었다. 그들 모두 주최 측이 제공한 이코노미석에 앉아 11시간을 날아왔다. 그중에는 육중한 체구 때문에 고생한 사람도 있었다. 한국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이야기다. 국회의원 알기를 우습게 안다며 아예 초청에 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권위와 특권의 외투를 벗어버리지 않는 정치인의 성공은 기대하기 어려운 세상이다. 정치인이 군림하던 시대는 갔다.

험난한 과정을 거쳐 금배지를 달게 된 것은 어떻든 축하할 일이다. 그러나 겸허한 자세로 민심의 보이지 않는 소리에 귀 기울일 준비가 안 돼 있다면 그들이 단 영광의 금배지는 금세 경멸의 금조각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