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인플레 그 정체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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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호 34면

물가 안정이냐, 일자리 창출이냐로 갈등을 빚을 때 정치인은 보통 일자리 쪽을 택한다. 실업사태 때문에 선거에서 지는 일은 많아도 인플레 때문에 지는 일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세계경제는 지금 경기후퇴(Recession) 위험 속에 인플레이션이 가속되는 혼조 국면을 보이고 있다. 국제 원자재값 폭등에 중국· 인도 등 새 성장센터의 수요 급증이 맞물리면서 형성된 인플레이션 세력과 미국의 경기후퇴-재동조화(Recoupling)-디플레이션(Deflation)으로 이어지는 경기후퇴 세력이 힘겨루기라도 하는 양상이다.

이 두 세력 사이에서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후퇴를 막으려는 정부와 물가 안정을 우선하는 중앙은행 간에 더러 갈등도 빚고 있다.

주요 원자재값 폭등은 물론 발등의 불이다. 1년 전보다 50% 이상 올랐다. 라면과 밀가루·휘발유 등 ‘피부물가’ 때문에 세계 각국의 가계는 괴로워하고 있다. 앞으로 값이 계속 오를 것이라는 가계와 기업의 인플레 기대심리가 가세하면서 글로벌 인플레이션 우려로 번지고 있다.

이제껏 인플레는 임금 상승-물가 상승이 서로 꼬리를 물며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구조였고 원자재값 폭등은 일시적 수급 불균형에 따른 교란현상 정도로 치부돼 왔다. 그렇다면 지금 임금이 그런대로 안정돼 있고 전체수급에도 큰 문제가 없는 상황에서 무엇이 인플레 세력을 떠받치고 있는가.

국제통화기금(IMF) 상품가격지수의 급등을 주도하고 있는 소맥·대두·원유·유연탄·전기동·철광석 등 6대 품목의 경우 가격 급등 원인으로 수급보다 투기자금과 달러화 약세 요인이 56%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원자재는 달러화로 거래되기 때문에 최소한 달러가치가 떨어지는 만큼 값이 오르기 마련이다. 달러가치가 떨어지면서 넘치는 달러들이 헤지 수단으로 이들 상품 투기에 몰려든다. 글로벌 인플레이션은 미국이 진원지라는 얘기가 된다.

한때 중국발 글로벌 인플레이션 경보가 나돌았다. 그러나 중국의 물가 급등은 식료품 가격 상승에 따른 것으로 서비스나 공산품 전반으로 확대되지 않고 있다. 중국은 물론 인도·브라질·러시아 등의 원자재 수요 급증이 가공할 ‘수요 유발 인플레이션’ 세력을 형성하지만 세계 수급 전체를 놓고 볼 때 제조업 성장센터의 중심이동 성격이 강하다.

투기적 요인이 가격 급등의 주요 원인이라면 국제 원자재 가격에는 거품이 없을 수 없고 투기 수요와 국제자본 움직임에 따라 급락할 수도 있다. 이런 측면에서 앨런 그린스펀 전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의 책임론도 거세지고 있다.

그가 초저금리와 신용 남발 등 방만한 통화관리로 세계에 글로벌 인플레이션을 퍼뜨렸다는 이유에서다. IMF 수석 이코노미스트를 지낸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교수는 ‘달러 블록’을 포함한 세계경제의 60%가 이 미국발 인플레이션에 감염됐다고 분석한다.

문제는 앞으로다. 미국경제는 완만한 후퇴와 깊은 후퇴의 언저리에 서 있다. 한번 기우뚱하면 세계경제를 후퇴로 끌어넣어 원자재 수요나 가격 상승 기대감에 찬물을 끼얹을 수도 있다. 이 때문에 글로벌 인플레이션 세력과 경기후퇴 세력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을 필요가 있다.

후퇴로 빠지는 것보다 어느 정도 인플레이션을 감수하는 편이 낫다는 견해가 미국에서는 힘을 얻고 있다. 유럽중앙은행(ECB)은 미국 경기후퇴의 전염을 우려해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한 금리 인상을 유보 중이다. 중국은 7% 인플레이션에 놀라 식료품 가격 통제에 나섰다.

그러나 오늘의 글로벌 인플레이션이 넘치는 달러와 방만한 신용이 불러온 ‘화폐적 현상’ 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52개 품목에 대한 전근대적 물가 관리에다 경기를 띄우기 위해 중앙은행 권능까지 넘보는 이명박 정부의 대응이 왠지 미덥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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