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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인이 만나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6호 19면

일러스트 강일구

주말마다 친정어머니를 만나러 가듯 ‘엄마가 뿔났다’를 본다. 김혜자가 연기하는 어머니 한자가 울고 웃을 때마다 바보같이 따라 허허거리다 훌쩍거리다 하면서 한 시간 동안 그 속에 황홀하게 푹 잠겼다 깨곤 한다.

이윤정의 TV 뒤집기

초등학생이었던 30여 년 전부터 그를 봐왔다. ‘전원일기’에서는 20여 년 화 한번 안 내고 자기를 감추어버린 조용한 그녀를 기억하고, ‘모래성’에서는 남편 박근형이 젊은 여자 김청과 바람나자 콜드크림을 목 주름에 덕지덕지 발라대며 불같은 증오를 뿜어내던 그녀가 머릿속에 남아 있다. 나에게 김혜자의 연기는 궁극의 경지 너머 저쪽에 있다.

김혜자는 늘 똑같은 것 같지만 조금씩 다르고, 다른 것 같지만 한결같은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김수현은 천하의 대가(大家)이지만, 한편으로는 연기자에게는 누구라도 그 속에 들어가면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아지게 만드는 굴레 같은 것이기도 하다.

다른 데서는 그렇게 연기하지 않던 배우들이 김수현의 드라마에만 오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따따따따” 식의 따발총 어투로 돌변해버린다. 누구도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이 단단한 아성을 김혜자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해석으로 넘어선다.

김수현 작가의 전매특허인 그 쏟아지는 대사에, 심지어 독백 내레이션까지 곁들여진 이 대사 과잉의 드라마 한가운데서도 김혜자는 대사에 밀려 절대 “따따”거리는 일이 없다. 오히려 그는 너끈히 문장 속의 쉼표를 살려가며, 혹은 만들어 가며 그 속에 천의 감정을 응축해낸다.

정확하게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중간중간 목소리에 힘을 빼면서 바람 빠진 듯한 가성이 섞여 들어가면서 그의 말은 기쁜 듯 슬퍼지고, 당당한 듯 떨리고, 새침한 듯 소탈하고, 절망적인 듯 낙관적인 독특한 음조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것은 작가가 이 어머니 한자를 통해 보여주고 싶은 모든 것이다.

돌이켜보면 부끄럽지 않고 행복하게 살아왔지만 자식들은 어느 하나 할 것 없이 그의 마음을 후벼 파고, 가난한 집안이라 무시당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사돈네 앞에 가서는 비굴해지기 싫어 밤새 고민한 말을 또박또박 쏟아내고, 배불러 온 며느리를 아무 말 없이 받아들이면서도 손자는 절대 내 손으로 봐줄 수 없다고 고개를 내젓는 이 어머니.

켜켜이 쌓여온 이 어머니의 감정이 자아내는 그 리얼한 조울증에 같이 빠져들지 않을 도리가 없다. 드라마 초반 둘째 딸의 마땅찮은 사윗감 이야기를 듣고 목욕탕에서 잘못 뿜어져 나온 샤워기 물줄기에 히스테리가 폭발할 때, “누구나 그렇겠지만 정말 사는 게 마음에 안 든다”고 절망할 때, 그러다가도 남편의 재롱 한 번에 깔깔대는 그 웃음소리에, 사돈네랑 일급 레스토랑에서 밥 먹으면서 후식으로 기껏 아이스크림을 시켰다고 후회하다가도 돌아서서 “그 거만한 사돈의 입을 확 쥐어뜯어 놨으면 좋겠더라”고 하는 그 소박한 저항의 모습에 같이 한숨 쉬었다 안타까워했다 통쾌해한다. 삶의 진가를 꿰뚫어버린 대가 작가와 국보급 연기자의 화학작용이 만들어내는, 참으로 행복한 감정의 전염이다.


이윤정씨는 영화 제작자로 활약한 문화통으로 문화를 꼭꼭 씹어 쉬운 글로 풀어내는 재주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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