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그린 ‘Arcus+Spheroid S 003’ 앞의 이상남. ‘아치 구름과 회전 타원체’를 뜻한다. [PKM 트리니티 갤러리 제공]
모두 지난해 그린 ‘Arcus+Spheroid’시리즈다. 동 성분 안료로 금빛을 낸 것도, 줄무늬 바탕이 이채로운것도 있다. 그렸다기보다 깎은 것들이라 실제로 보면 표면이 층층이 도드라져 보인다.
이상남은 건축가다. 매끈한 표면 한쪽에 원·직선이 얽히고 설켜 있는 그의 그림은 흡사 건축 도면 같다. 그는 “내 작품은 자연이 아니라 인공에 대한 기억, 문명이 진화된 이들이 만들어낸 지점에서 시작한다. 그게 내 풍경화고 정물화다”라고 잘라 말한다. 집요하게 절제됐고, 순수하게 기하학적인 화면 앞에 서서 그는 “직선은 죽음이며, 원은 삶이다. 원과 직선이 DNA의 나선구조처럼 엉켜 들어간다”고 덧붙였다. 작업실엔 이번 전시 공간 모형을 직접 만들어 놓고 작품을 구상 중이다.
이상남은 장인이다. 작업 과정이 노동집약적이다. 화가보다 공예가들에게 친숙한 옻도 사용한다. 그는 매일 9시간 정도 작업실에 틀어박혀 패널에 옻칠하고, 그 위에 대리석 가루 안료를 칠하고, 아크릴 물감을 또 칠한다. 그렇게 겹겹의 표면을 만든 뒤 물먹인 사포로 깎기 시작한다. 그러면 아크릴 물감 밑 뿌연 대리석 표면이, 그 밑에 칠흑 같은 옻칠 표면이 드러난다. 그의 그림은 끝없이 반복되는 수공의 산물이다.
아니다, 다 틀렸다. 이상남은 어디까지나 화가다. 온갖 기기묘묘한 매체의 시대에 회화를 고집한다. 회화의 본질인 평면성과 씨름한다. “나는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 즉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이미지를 씹고 또 씹는 과정에 주목한다”고 말한다. 디지털 시대의 아날로그 작업, 그래서 이상남의 그림을 들여다보는 것은 아이러니로의 여행이다. “선이 수없이 반복되면서 엉키기도 하고, 새까매지기도 하고, 아무 것도 아닌게 되기도, 뭔가 대단한 게 되기도 한다. 그게 바로 회화가 갖는 매력이다.”
그는 야심가이기도 하다. 26세 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참여할 만큼 잘나가던 신예 이상남은 1981년 돌연 뉴욕으로 떠났다. “뉴욕에 가서 좋은 점은 붓을 다시 잡은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이전에 하던 단색화, 사진을 가차없이 버렸다.
“저들과 내가 다른 게 뭘까 끊임없이 고민했다. 절벽에 선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러고 나니 점 하나 직선 하나도 훌륭한 이미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지금의 기하학적 추상화가 나오기까지 11년쯤 걸렸다. 생계는 정원사, 목수, 남의 작업의 조수 노릇으로 꾸렸다.
권근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