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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프랑스 新철학 기수 베르나르-앙리 레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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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귀하는 20여년전 발표된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에서 공산주의의 몰락을 일찍이 예견한 바 있습니다.공산체제의 몰락과 냉전 종식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승리라고 보십니까.또 앞으로도 이 두가지 가치는 진보와 번영을 위한 결정 적 동인(動因)으로 변함없이 힘을 발휘할 걸로 보십니까.
『두 질문 모두에 대한 나의 대답은「그렇다」는 것입니다.다만냉전 종식과 공산체제의 붕괴로 과연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더 강화됐는지는 의문입니다.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자본주의나 민주주의가 계속 힘을 발휘하려면「적(敵)」이 필요 합니다.공산주의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떠받치는 기둥 가운데 하나였습니다.공산주의의 붕괴로 그 기둥 하나가 사라졌다는 점은 현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직면한 불안요인 가운데 하나가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대체할 제3의 이데올로기가 출현할 가능성은 없겠습니까.
『카를 마르크스가 한 얘기 가운데 제가 즐겨 인용하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역사의 상상력은 인간의 상상력을 초월한다」는 것이지요.역사는 우리가 생각도 못했던 많은 것들을 이뤄 냈어요.그렇다고 볼 때 불가능할 것은 없겠지만,현재로선 제3의 대안으로 눈에 띄는 것은 없습니다.』 -자크 시라크의 승리로 끝난프랑스 대통령선거 이후 프랑스의 드골주의 회귀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습니다.이미 시라크는 핵실험을 재개한다고 발표해 국제적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프랑스의 드골주의 회귀 우려는 근거가 있다고 보십니까.
『그렇습니다.시라크란 인물은 드골 개인의 성향과 스타일.이념에 진심으로 충실한 사람입니다.그는 지금이 프랑스의「위대성」을재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보고 있어요.앞으로 계속해서 드골주의와 프랑스의 위대성을 연결하려할 겁니다.
그 첫번째 시도면서 가장 좋은 예가 핵실험 재개 결정입니다.
』 -개인적으로 시라크의 핵실험 재개 결정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동의하지 않습니다.두가지 이유 때문입니다.첫째 핵실험 재개 결정에 깔려있는 복고주의적 경향성 때문입니다.핵실험은 방위전략의 현대화라기보다는 냉전시대,즉 과거로의 회귀에 지나지 않습니다.둘째는 핵실험 재개가 몰고올 파장과 반발을 시라크는 과소평가했다는 점입니다.지금은 그린피스가 레인보 워리어 2號를타고 시위를 하고,그것이 나중에야 알려지는 그런 세상이 아닙니까.CNN을 타고 지구전체로 리얼타임으로 생중계되는 세상입니다.』 -귀하는 한때 방글라데시정부 자문역을 맡는등 아시아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지금도 그 관심에는 변함이 없습니까.또 다음 세기에는 서구와 북미에 이어 동아시아가 세계의 중심으로 부상할 거라는 일부 견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0여년전부터 아시아는 나의 계속적 관심대상이었어요.역사적.문화적.기술적으로 동아시아가 세계의 중심축으로 부상할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믿습니다.그러나 두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권위주의와 극단적 민족주의라는 두가지 악(惡)과 완전히 결별해야 한다는 겁니다.이 조건만 충족된다면 동아시아는 21세기 세계무대에서 리더십을 발휘하기에 충분한 문화적 저력과 역동성을 갖추는것입니다..』 -귀하는 지난해 보스니아 문제에 대한 서방의 미온적 자세를 규탄하기 위해 사라예보에 직접 들어가『보스나』란 영화를 만들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바 있습니다.그런가 하면 보스니아 문제를 걱정하는 지식인들을 규합,94년 유럽의회 선거에 직접 나서기도 했습니다.지금도 보스니아 회교정부에 대한 무기 금수(禁輸)해제가 분쟁종식을 위한 최선의 방책이라고 믿고 있습니까.그리고 귀하가 주장하는 서방의 적극적 행동이라는 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군사개입을 보다 강화 해야 한다는뜻입니까.
『내가 말한 서방의 행동은 정치적 결단을 의미하는 것이지 군사개입을 뜻하는 건 아닙니다.무력으로는 결코 이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없어요.서방 주요국들은 침략자와 피해자를 명확히 구분하고,보스니아내 인권유린의 책임소재를 분명 히 하며,세르비아를 국제사회에서 고립시키고,라도반 카라지치(보스니아내 세르비아계 지도자)나 슬로보단 밀로세비치(세르비아공화국 대통령)가 책임있는 대화상대가 될 수 없음을 명백히 선언했어야 해요.
그랬더라면 사태가 이 정도까지 악화되지 는 않았을 겁니다.보스니아정부에 대한 무기금수해제가 분쟁종식 방안의 하나일 수는 있겠지요.분쟁종식은 힘의 균형을 통해서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그러나 무력은 적을수록 좋습니다.따라서 보스니아정부의 무력증강보다는 세르비아계의 무력약화를 통해 힘의 균형을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입니다.세르비아계가 끝내 협상을 통한 문제해결과 무력감축을 거부한다면 마지막 선택으로 보스니아정부에 대한 무기금수 해제를 생각할 수 있다고 봅니다.』 -보스니아 내전을 기독교문명과 이슬람문명의 충돌로 보는 학자들이 있습니다.하버드대학의 새뮤얼 헌팅턴교수 같은 사람이 그렇습니다.귀하가 생각하는보스니아 내전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헌팅턴교수의 분석은 빈약하고,단편적이며,지적으로도 진지한 분석이 아닙니다.보스니아내 회교도가 이슬람문명을 대표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입니다.보스니아 인구의 대다수는 물론 회교도입니다.그러나 그들은 매우 특수한 회교도들이죠.세속화한 회교도들이고,유럽지향적 회교도들이며,말이 회교도지 실제로는 무신론자에 가까운 회교도들입니다.
보스니아 내전은 정치적 대립이지 종교적 대립이 아닙니다.침략자와 피해자,전체주의와 민주주의간의 정치적 대립이지요.카라지치와 밀로세비치는 세르비아라는 단일인종으로 구성된 동질적 공동체를 꿈꾸며 「인종청소」를 자행하고 있습니다.이에 비해 보스니아인들이 추구하는 보스니아는 서로 통하고,서로 섞이는 평화롭고 숨쉴 수 있는 공동체입니다.따라서 보스니아사태의 본질은 단인종사회를 꿈꾸는「전체주의」와 다인종 사회를 추구하는「세계주의」간의 대립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귀하는 알제리 태생의 프랑스인입니다.알다시피 현재 알제리에서는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과 군부독재정권간에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 진행중입니다.사태의 가장 큰 책임이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또 이슬람 근본주의를 탈냉전후 서방■ 안정과 평화에 대한 가장 큰 위협요인으로 보는 일부시각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책임을 말할 때는 분명히 구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역사적책임과 현실적 책임입니다.알제리 사태와 관련해 역사적으로 가장큰 책임을 져야할 것은 서방,특히 프랑스 식민주의입니다.그러나현실적 책임,좀더 구체적으로 지금 이 순간 알제리에서 벌어지고있는 극한적 폭력사태에 대한 책임은 이슬람 테러리즘에 있다고 봅니다. 폭압적이고 부패한 정권도 문제지만,그보다 더 위험한 것은 이슬람주의입니다.그러나 앞으로 이것이 서방에 대한 최대의위협요인이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단언하기 어렵습니다.이슬람 자체가 위험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종교를 정치세력화 하려는 이슬람주의자,특히 광신적 이슬람주의자들 가운데는 공산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이념은 이슬람주의라고 공언하는 자들이 있습니다.그들의 말이 맞다면 앞으로 이슬람주의가 서방의 안정과 평화에 최대 위협요인이 될거라는 전망은 논리적으로 타당한 분석이겠지요.』 -귀하의 저서는 한국의 지식인들 사이에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얼마전 귀하가프랑스의 여류명사 프랑수아즈 지루와 공동으로 펴낸 책『男과 女』는 中央日報에 의해 번역출판되기도 했습니다.한국에 대한 귀하의 인상은 어떤 것인지 듣고 싶습니 다.
『86년 한국에 한달간 머무른 일이 있습니다.당시 많은 사람을 만났고,여러 곳을 돌아다녔어요.그 때 받은 인상은 「아시아에 대한 인상」이란 책에 상세히 기술돼 있습니다.한국은 내게 매우 흥미있는 나라입니다.기회가 온다면 다시 한번 방문하고 싶습니다.』 -귀하의 이름에는 항상 「新철학의 기수」라는 별명이따라붙습니다.하지만 때로는 「철학자의 얼굴을 한 섹스심벌」이라는 등 매우 거친 비난도 함께 따라다니고 있습니다.귀하는 자신을 어떻게 규정하십니까.여전히 철학자라고 규정한다면 21 세기를 앞둔 이 시점에서 철학자의 역할은 어떤 것이어야 한다고 보십니까. 『성적 매력이 있는 것으로 비친다는 건 나쁘지 않은 일이고,더구나 제가 그렇다면 그건 정말 반가운 일이겠지요.자신이 자신을 규정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입니다.25년전부터 저는 철학과 소설.희곡.시나리오.영화.언론.정치등 다방면에 참 여해왔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어느 특정 지점에 머무르지 않고,서로 교류하고 만나는 지점에 위치해온 많지 않은 사람 가운데 하나며,이것은 저의 큰 기쁨이자 자부심의 원천이 되고 있습니다.
***나는 세계의 市民 세기말에서 철학자의 역할,그것은 첫째생각하는 것이고,둘째 증언하는 것이라고 봅니다.생각한다는 건 철학적 차원에서 인간과 세계를 탐구하는 것이고,증언한다는 건 현실에 참여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끝으로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민족주의를 경계해야 한다는 겁니다.지식인이면서 동시에 민족주의자일 수는 없습니다.「민족주의적 지식인」이란 말 자체가 모순입니다.특히 작가에게 조국이란 없습니다.물론 나는 프랑스인입니다.그러나 그에 앞서 나는 세계의 시민입니다.작 가로서 나는프랑스어로 글을 쓰지만 내게 있어 프랑스어는 모국어가 아니라 하나의 언어일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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