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지 않은 테마! 가볍게 풀어갑니다~"

중앙일보

입력

가벼운 코믹멜로가 대세인 대학로에 모처럼 관객에게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연극 두 편이 무대에 올랐다. 미용사 리타의 자아실현 과정을 따라간 ‘리타 길들이기’(최우석 연출)와 15년 전의 사건과 감정의 진실을 더듬어가는 ‘블랙버드’(이영석 연출)가 그것. 진중한 주제를 풀어가는 극의 중심에 최화정과 추상미가 서있다.

소통의 단절… 편협… 묵직한 메시지가 담겨


블랙버드 / 추상미
  “공연을 보시면서 불편했다면 제대로 관람하신 거예요(웃음). 관객을 가만히 앉아있게 하지 않죠.”
  지난달 25일 인터뷰 자리에 나온 추상미는 다소 지쳐 보였다.
  “공연을 시작하기 1~2시간 전부터 상처 깊은 우나의 감정에 몰입을 해요. 우나는 불안감과 긴장감이 있는 인물이죠. 마음이 편해지면 역할을 제대로 소화해낼 수 없는 작품이네요.”
  국내 초연인 ‘블랙버드’는 배우나 관객에게 편한 작품이 아니다. 끊임없는 갈등과 마지막 반전에 이르기까지 100분간의 팽팽한 긴장감이 무대뿐만 아니라 객석에 고스란히 이어진다.
  지난해 영국의 권위 있는 연극상인 올리비에 베스트 희곡상을 수상한 이 작품이 표면적으로 다루는 이야기는 ‘열두 살 소녀(우나)와 마흔 살 남자(레이)의 부적절한 관계, 그리고 15년 만의 대면’이다. 그러나 공연 내내 단 한번의 퇴장 없이 남녀 주인공이 무대 위에 펼쳐 보이는 심리전 속엔 소통의 단절, 사회의 편협된 잣대 문제를 곱씹게 하는 묵직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과거의 일이 ‘사건’이었는지 ‘사랑’이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기억을 서로 맞춰가는 과정에서 우나와 레이는 서로 다른 소통 방법을 보여줘요. 각자 자기의 기억과 입장만 얘기하죠. 형식은 대화지만 내용은 아니에요. 둘은 정말 순수하게 사랑했을 수도 있는데, 상대의 진실을 볼 수 없도록 만든 주변의 시선과 사회 제도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하죠. 캐릭터나 주제가 입체적이고 복합적이어서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는 작품이에요.”
  그의 표현대로라면 ‘공연 내내 아드레날린이 솟구칠 것 같은’ 이 작품을 3년 만의 연극 복귀작으로 선택한 것은 ‘작품의 진정성’에 대한 믿음에서였다.
  “작품을 고를 때 직관에 의존한다”는 그에게 작품의 첫 인상은 신선하고 충격적이었다. 감각적이며 세련된 형식도 끌렸다. ‘진짜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다. ‘열정을 갖고 온몸을 던져 연기할 만한 작품’을 번역가 성수정씨에게 직접 의뢰해 얻은 것이어서 그에겐 더욱 의미가 깊다.
  “객석 의자에 등을 기대고 편하게 볼 수 있는 작품은 아니에요. 관객을 동요하고 혼란스럽게 하죠. 그렇다고 스토리가 어려운 것은 아니에요. 인물과 주제가 겹겹이 싸여 있을 뿐이죠. 가볍고 편한 공연에 익숙한 관객에겐 연극의 다른 맛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거예요. 아무런 선입견 없이 공연장에 와주셨으면 합니다.”
  블랙버드는 일생에 한번쯤 다가오는 유혹, 성경에서 죄인의 눈을 쪼아 먹는 새를 상징한다.
5월 25일까지, 동숭아트센터 소극장. 문의 02-766-6007

초연 당시 인기 폭발, 17년만에 리타後 맡아


리타길들이기 / 최화정
  “옷을 몇 번 갈아입고 나오는지 세는 관객도 있어요. 집에 있는 것을 모조리 공연장에 가져다 놨더니 외출할 때 입을 옷이 없어요.(웃음)”
  막이 전환될 때마다 달라지는 리타의 옷차림은 ‘리타 길들이기’를 보는 재미 중 하나다. 배움에 대한 갈증을 느끼던 리타가 지식세계에 조금씩 길들여져 가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의 옷차림이다.
  1991년 국내 초연된 ‘리타 길들이기’는 미용사 리타와 중년의 교수 프랭크의 문학수업을 통해 자아실현 욕구, 계층간의 갈등, 지식의 허위성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최화정은 초연에 이어 17년 만에 다시 리타 역을 맡았다.
  “초연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작품이에요. 그 역을 다시 맡으리라고는 상상을 못했죠. 잘 해야 본전이란 생각에 부담스러웠어요.”
  연극열전2 프로그래머인 조재현의 제안을 받았을 때만해도 완고하던 그의 마음을 돌린 것은 개그우먼 이영자의 한마디였다.
  “‘언니를 안 지 10년이 넘었는데 연기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말에 울컥하더라고요.”
  극중 스물여덟이라는 리타의 나이도 걸림돌이었다. “아무리 동안이라지만(웃음) 20년 가까이 건너뛰기가 쉽나요. 혹시 객석에서 ‘에이, 재수 없어’란 반응이 나오지나 않을까 걱정됐죠.”
  공연이 시작된 이후 라디오 방송 중에도 틈틈이 인터넷을 통해 공연 관람 후기를 확인한다는 그는 “20년 가까운 세월이 무색하다는 평을 보고 나면 하루 종일 굶어도 배가 안 고프다”고 했다.
  오랜만에 무대에서 느끼는 객석의 열기도 요즘 그를 달뜨게 한다. 월요일에 공연이 없는 게 아쉬울 정도다.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대사를 틀리지 않으려고 애쓰느라 초연 때 놓쳤던 것들을 이번 공연에서 새롭게 발견하는 일도 즐겁다.
  리타를 바라보는 프랭크에게 연민이 느껴지는 것도 초연 때와 다른 점이다. ‘또 한번 어른이 돼가는구나’란 생각을 한다.
  “남의 말을 인용하고 남의 노래를 흉내 내던 리타가 결국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오죠.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사는 게 행복인 것 같아요. 물론 그냥 얻어지는 것은 아니지만요. 리타에 공감하는 이유는 우리 안에 리타의 모습이 있기 때문일 거예요. 더 많은 관객이 사랑스런 리타를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5월 18일까지, 원더스페이스 동그라미극장.

프리미엄 김은정 기자
사진=프리미엄 황정옥 기자 ok76@joongang.co.kr>
프리미엄 최명헌 기자 choi315@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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