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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무원의 참신한 주총 실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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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미국 네브래스카주는 중부 대평원에 자리잡은 시골이다. 가장 큰 도시라는 오마하의 인구가 40만 명 안팎이다. 그러나 일년에 딱 한 번 오마하가 전 세계 언론에 오르내리는 때가 있다. 매해 5월 첫째 주 토요일이다. 전설적인 투자가 워런 버핏이 이끄는 버크셔 해서웨이 주주총회가 이곳에서 열리는 날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5월 3일 주총 날짜가 잡혔다.

1962년 버핏은 매사추세츠주 작은 도시에 묻혀 있던 버크셔 해서웨이란 회사를 주당 8달러에 사들였다. 본래 방직회사였던 버크셔 해서웨이는 그의 말을 빌리자면 ‘누군가 피우다 말고 버린 장초’였다. 버핏의 손에서 투자회사로 탈바꿈한 이 회사 주가는 현재 13만 달러가 넘는다. 46년 만에 1만6000여 배가 된 셈이다. 그가 올해 마이크로소프트 빌 게이츠 회장을 제치고 세계 최고 부자가 된 비결이다.

2003년 그가 주재한 주총 현장을 취재할 기회가 있었다. 주총장은 오마하에서 가장 큰 실내체육관이었다. 전국에서 주주가 모였다. 모두엔 버핏이 등장하는 동영상을 틀었다. 개그맨으로, 영화배우로, 가수로 분장한 버핏이 청중을 쥐락펴락했다. 무거웠던 주총장 분위기는 어느새 공연장처럼 들떴다.

한바탕 배꼽을 잡고 나자 버핏과 찰리 멍거 부회장이 한복판에 자리 잡았다. 당시 버핏은 72세, 멍거는 79세였다. 두 사람은 결산보고서를 설명한 뒤 즉석에서 질문을 받았다. 여기저기서 손이 올라갔다. 남녀노소가 따로 없었다. 중간에 30여 분 쉬는 시간 빼고 문답이 오간 시간만 장장 5시간이었다. 버핏은 세계 경제, 증권 시장, 회사 경영에서 후계자 문제까지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밝혔다. 이 회사 주총에 투자자 이목이 집중되는 건 이 때문이다. 투자에 관한 그의 ‘원 포인트 레슨’은 주총에서만 접할 수 있다.

주총이 끝나기 무섭게 버핏은 버크셔 해서웨이가 운영하는 가구회사로 달려갔다. 주주 초청 바비큐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앞치마를 두르고 손수 고기를 굽는 그의 모습은 마치 마음씨 좋은 옆집 할아버지처럼 느껴졌다. 이튿날 아침 보석을 파는 자회사 보샤임에서 연 사인회에도 버핏이 나왔다. 이번엔 부인까지 대동했다. 주주들에게 그가 사인을 해주는 동안 부인은 옆에서 피아노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세계 최고 부자, 그것도 70대 회장 부부로부터 이런 대접을 받은 주주가 어떤 기분일지는 물어보나 마나였다.

그를 보면서 우리의 주총 풍경이 계속 오버랩됐다. 회사가 정한 안건만 후다닥 상정한 뒤 쫓기듯 의사봉을 두드리고 끝내는 게 우리 주총의 전형이다. 이러다 보니 소액투자자에게 주총 안건은 지루한 ‘염불’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주총 기념품이란 ‘잿밥’에만 눈길이 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올해 주총에선 참신한 시도가 눈에 띄었다. 지난 20일 서울 예장동 ‘문학의 집’에서 열린 풀무원 주총이었다. 이 회사 남승우 사장은 아나운서와 토크쇼를 하듯 주총을 이끌었다. 톡톡 튀는 즉석 질문도 쏟아졌다.

“사장이 아니라 친구 입장에서 지금 주식 사라고 할 수 있습니까?” “사장님 머리 모양 ‘짱’입니다. 언제부터 머리카락을 밀어버리셨나요?” “두부 사업에서 경쟁사에 밀린 이유가 뭡니까?”

남 사장은 두 시간여에 걸쳐 주주들의 궁금증을 일일이 풀어줬다. 주총 후에는 주주들에게 신제품으로 점심을 대접했다. 어쩐지 버크셔 해서웨이 주총을 많이 닮았다 했는데 사실이 그랬다. 이 회사 사외이사가 우연히 버핏의 주총 동영상을 보고 아이디어를 냈다. 풀무원은 앞으로도 주총을 이런 식으로 열 계획이다.

요즘 재계에선 적대적 인수합병(M&A) 방어 장치를 빨리 만들어 달라고 아우성이다. 외국인 공격에 국내 기업은 속수무책이란 이유에서다. 하지만 그 전에 짚어볼 게 있다. 우리 기업은 과연 주주를 주인으로 대접하고 있는지. 그보다 강한 적대적 M&A 방어책이 없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정경민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