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먹는 것이 바로 삶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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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뉴욕에서 활동중인 미술가 박유아<左>씨가 설치작품 '최후의 만찬'퍼포먼스에서 관객에게 밥을 퍼주고 있다.

“똑똑똑, 똑똑똑.”

어둠 속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청아한 소리만 선명하게 들렸다. 공간을 지배하는 적막한 분위기. 고요함, 쓸쓸함, 그리고 외로움.

그 속에서 조용히 주걱을 들고 서 있는 한 여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앞에는 밥이 가득 담긴 흰색 자기가 놓여 있었다. 오후 7시 정각, 그는 숨죽여 기다리던 관객들에게 밥을 퍼주기 시작했다.

27일 (현지시간) 미국 뉴욕의 ‘존 첼시 센터 오브 아트’. 현지에서 활동 중인 미술가 박유아씨의 설치작품 ‘최후의 만찬’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최대 둘레 80cm의 커다란 흰색 자기(瓷器) 13개를 늘어놓은 이 작품은 인간의 원초성에 대한 기나긴 성찰의 결과물이라고 한다.

“종교처럼 심오한 것을 포함한 삶의 모든 것은 결국 ‘밥을 먹는다’는 데 귀착한다는 걸 일깨워주고 싶었다”는 게 작가의 설명이다. 배고픈 모든 이에게 아낌없이 밥을 나눠주고 싶다는 마음에 물레로 만들 수 있는 최대 크기로 자기를 만들었단다. ‘13’이란 숫자는 최후의 만찬에 참석했던 예수와 12 제자를 뜻한다. 종교적 의미도 담은 것이다.

이날의 퍼포먼스는 박씨와 함께 뉴욕에서 명성을 쌓은 벨로루시 출신의 예술가 파샤 라데츠키의 합작품이었다. 박씨의 행위에 맞춰 라데츠키는 빛과 음악을 조절했다. 라데츠키는 함께 상영된 자신의 비디오 작품 ‘가짜 라운지’에서 “삶에선 단순함과 복잡함이 공존한다는 것을 표현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퍼포먼스가 진행된 갤러리 한 쪽에는 ‘붉은 도장밥’, 즉 인주(印朱)를 이용해 만든 박씨의 작품 100점이 전시돼 있다.

동양화 기법을 여러 방면으로 응용해온 그는 이번에 인주라는 독특한 소재를 대담하게 사용해 뉴욕 화단의 시선을 끌었다. 게다가 그는 붓이 아닌 손가락으로 작품을 제작했다.

‘레드 페인팅’이란 제목의 이들 작품은 인간 관계에 초점을 맞췄다고 한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만나온 100명과의 관계를 강렬한 느낌의 붉은 색 인주를 이용해 표현한 것이다.

핏빛과 흡사한 인주는 밝으면서도 섬뜩한 느낌을 준다. 한편으론 즐거우면서도 다른 편으로는 지극히 힘든, 작가가 여러 사람의 삶에서 받았던 느낌이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박씨는 “그동안 알아온 여러 사람에게서 받았던 느낌을 떠올리면서 이번 작품들을 만들어 나갔다”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박씨는 레이저를 이용해 금속을 붓으로 쓴 한자 모양으로 잘라낸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뉴욕=남정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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