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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기관장 사퇴, 규범이 필요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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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최근 참여정부하에서 임명된 정부 산하 기관장들의 사퇴문제가 뜨겁다.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 유인촌 문화부 장관 등이 이명박 정부의 지향과 코드가 맞지 않는 인사들의 자진사퇴를 촉구했다. 현 정부는 ‘정권이 바뀌었으니 당연히 재신임을 물어야 한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야당에서는 ‘낙하산 인사’를 위한 정지작업이고 임기제를 무력화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미 일부 기관장의 사퇴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한쪽은 신정부의 팀워크를 해치는 눌러앉기식 행태로, 다른 한쪽에서는 신정권의 오만함을 반영하는 독선적 행태로 규정하면서, 쌍방이 끝없는 평행선을 그릴 것으로 보인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문제를 정치적 호불호를 떠나서 모든 경우에 적용되는 ‘일반적 규범 형성’의 차원에서 접근해 보자고 주장하고 싶다. 어차피 산하 기관장의 임기가 대통령의 임기와 일치하지 않는 마당에 이러한 현상은 계속 반복될 수밖에 없다. 어차피 정권교체 때마다 반복되는 사안이라면 매번 이중적 기준을 정해 국민들에게 정치불신을 심화시키기보다 여야가 머리를 맞대고(법률이 정하는 성문법적 규범이 아니라), 일종의 관습법적인 새 규범을 정하는 식으로 논의해 보자는 것이다.

현 단계 한국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큰 불신 중 하나는, 한 정당이나 한 정치인이 야당일 때 하는 이야기와 여당일 때 하는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완전히 동일한 사안을 두고 정반대의 기준을 적용한다. 흔히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스캔들’이라고 하는 식의 이중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다. 그 결과 총체적인 정치불신은 갈수록 심화된다.

예컨대 이번에 현 정부가 바라는 대로 산하 기관장들이 다 사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앞으로 차기 정권에서도 적용되는 일반적 규칙으로 삼는 전제 위에서 그렇게 하자는 거다. 한나라당도 차기 정부가 바뀌었을 때 임명직의 경우 일괄 사퇴하는 것을 천명하고 다음에 정권이 바뀌었을 때도 그렇게 하기로 약속한다. 아니면 임기를 존중하는 식의 합의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럴 경우 차기 정권도 임기를 존중해야 한다. 아니면 ‘임기가 1년 미만 남은 기관장의 경우 일괄 사퇴’를 일반 규범으로 상정해 보자.

물론 일반 규범을 정하는 경우에도 갈등의 소지는 있다. 누가 먼저 양보를 하고 누가 먼저 손해를 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지금부터 적용하면 참여정부 때 임명한 기관장이 사퇴하므로 야당이 좀 손해를 보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다음부터 적용하면 현 정부가 손해 보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최소한 사생결단식의 대립은 불필요하게 된다. 길게 보면 모두에게 득이 될 수 있다.

갈등과 대립은 사실 정치의 기본 구성요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제는 모든 의제를 사사건건 갈등의 소재로 삼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한국 정치는 지나치게 모든 사안에서 정치가 전쟁(戰爭)이 되어 있다. 즉 정치적 반대파에게 불리한 모든 것을 쟁점화한다거나, 모든 쟁점에 대해 사생결단식으로 싸우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화 20년이 된 지금, 여야 간의 정권교체가 이미 일상화된 지금, 다른 정치문화와 다른 정치규범이 만들어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것은 아마도 사생결단식의 정략화 또한 모든 쟁점의 정략적 쟁점화가 적어지는 데서 찾아지지 않을까 싶다. ‘소모적 정략화’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우리가 일반적 규범 형성의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민주화라고 하는 것은 사실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규칙을 만들어 가고 공유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불편하지 않고 너는 모두 불편해라’든지, ‘이번에만 이런 기준으로 싸우고 다음에는 다른 기준으로 싸우겠다’는 식의 접근방식을 넘어서야 한다. 그럴 때 한국 정치에도 ‘비적대적 공존’의 영역이 확대될 것이고 한국 정치는 그만큼(갈등하기는 하되) 정치적 안정성이 확대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 국민이 바라는 정치발전이 아닐까 싶다.

조희연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