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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브레히트 시선집 『살아남은 자의 슬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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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호 36면

모든 산봉우리에
정적이 깃들고
모든 나뭇가지 끝에서
그대는 숨결조차 느끼지 못한다.
숲속의 작은 새들은 침묵한다.
잠깐만 기다려라, 곧
그대도 휴식하게 되리니.

서정시 쓰기 힘든 시대, 슬픔을 등에 지고 …

이것이 괴테의 유명한 시 ‘방랑자의 밤노래’이다. 이제 이 시를 패기만만하고 불온하기 짝이 없는 스물여섯 살의 시인이 어떻게 패러디했는지 보자.

언젠가 이곳에
늙은 여자가 한 사람 나타났습니다.
그 여자는 먹을 빵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빵은 군인들이 다 처먹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때 그녀는 차가운 하수도에 빠졌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더 이상 배가 고프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숲속의 작은 새들은 침묵했다.
모든 나뭇가지 끝에 정적이 깃들고
모든 산봉우리에서 그대는
숨결조차 느끼지 못한다.

1927년 출판된 브레히트의 첫 시집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가정기도서』에 나오는 시 ‘숨결에 관한 기도문’은 고통과 모순 가득한 현실에 대해 침묵하는 시민문학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다.

우선 『가정기도서』라는 시집 이름부터가 심상치 않다. 제목만으로는 엄숙한 종교적 분위기에서 사람들에게 선량한 미풍양속을 가르칠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내용은 영 딴판이다. 예컨대 ‘위대한 감사의 송가’는 하늘의 영광이 아니라 “추위와 어둠과 멸망을 찬양하라!”고 가르친다.

하늘의 나쁜 기억력을 진심으로 찬양하라!
그리고 하늘이 그대들의
이름도 얼굴도 모른다는 것을 찬양하라.
그대들이 아직도 살아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른다. ……
그대들은 아무런 걱정 말고 죽어도 된다.

이처럼 저항정신이 뻗치는 젊은 시인이 히틀러가 집권한 독일 사회에서 편안하게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는 33년 독일을 떠나 프라하·빈·취리히를 거쳐 덴마크의 스벤보르라는 곳으로 망명했다. 이 시기에 그는 단순히 반사회적이거나 허무주의적인 관념을 벗어나 더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하는 시를 쓰게 된다. 역사의 흐름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것이고 우리는 마땅히 올바른 사회를 만들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의식이 깨어야 한다.

그럴진대 시와 문학은 저 높은 곳에서 청아한 소리로 음풍농월(吟風弄月)할 것이 아니라 ‘현재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눈을 뜨도록 구체적인 진리를 이야기해야 한다. ‘배움을 찬양함’에서 그는 이렇게 외친다.

배워라, 난민 수용소에 있는 남자여!
배워라, 감옥에 갇힌 사나이여!
배워라, 부엌에서 일하는 부인이여!
배워라, 나이 60이 넘은 사람들이여!
학교를 찾아가라, 집없는 자여!
지식을 얻어라, 추위에 떠는 자여!
굶주린 자여, 책을 손에 들어라.
책은 하나의 무기다.
당신이 앞장을 서야만 한다.

나치 독일이 덴마크까지 밀려오자 그는 시베리아를 넘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배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마르크시즘에 경도되었던 시인으로서는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미국 자본주의 문화의 1번지인 할리우드에 주거를 정하였다. “아침마다 밥벌이를 위하여/ 거짓을 사주는 장터로 갔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는 많은 동지가 처참하게 죽어간 마당에 자신은 그렇게나마 살아남았다는 데 대한 자괴감이 짙게 묻어난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폭력이 넘쳐나는 이 세계,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를 살아야 했던 그의 편력은 그 후에도 계속된다. 47년 미국에서 사실상 쫓겨난 브레히트는 서독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군정당국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동베를린에 정착해 그곳에서 생애 마지막 기간을 보냈다.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동독에서 보낸 브레히트의 만년도 결코 행복하지는 않았다. 냉전 상황은 끝까지 이 시인에게 깊은 고뇌를 안겨주었다. 동독은 결코 사회주의 천국은 아니었던 것이다.

저녁이 되면 전기가 끊어질 정도로 경제 여건이 안 좋은 상황에서 소련이 요구하는 군사력 증강은 큰 부담을 가중시켰고 중공업 우선 정책의 결과 식품과 소비재가 매우 부족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독 당국이 내놓은 방안은 기껏해야 노동자에게 더 많은 노동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53년 6월 17일 동베를린에서 10만 명 이상이 참가한 노동자 봉기가 일어났다. 당국은 무력 진압을 결정했고 곧 소련군 2만 명과 탱크가 들이닥쳤다.

당시의 공식 발표에는 ‘겨우’ 55명만 죽은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사실은 400명 이상이 죽었고, 그 후 군사법정에서 백 명 이상이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제 시인은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차라리 정부가 인민을 해산해 버리고 다른 인민을 선출하라”는 식의 야유 섞인 시 몇 편을 썼을 뿐…. 당국의 지원을 받아 문학 활동을 하고 있었고, 스탈린을 찬양하는 시까지 써야 했던 그는 당과 인민 사이에서 명백한 입장을 취하지 못했다. 그의 마지막 시편들에서는 냉전시대 분단국가의 지식인이 느껴야 했던 모멸과 고통이 가슴 아프게 드러나 있다.

어젯밤 꿈에는
마치 문둥이를 손가락질하듯
나를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들을 보았다.
그것들은
일을 너무 해서 닳아빠지고 잘려져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놈들 같으니라고!
죄의식 속에서
나는 이렇게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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