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산업계 더 발전하려면 고졸·대졸 차별부터 없애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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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스스로를 ‘삼성인’이라고 부르는 일본 사람이 있다. 삼성전자에 목숨을 걸었다고까지 말하는 사람이다. 도요타에서 30년간 일한 뒤 18년째 삼성전자에 ‘도요타 방식’을 조언해 온 기술컨설턴트 무라타 후쿠조(村田福造·70·사진)다. 그는 매달 보름 정도 한국에 머물며 임직원을 교육하고 혁신활동을 한다. 16일 삼성전자 수원공장 인근 숙소에서 만난 그는 “삼성을 포함한 한국 산업계가 더 발전하려면 고졸·대졸 간 차별부터 없애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지난해 8월 기흥공장 정전 사태의 근본 원인은 한국의 낮은 설비 기술력 때문이라고 말했다. 일본과 미국에서 장비를 들여와 설치만 하는 방식으론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는 지적이었다. 19세부터 도요타 계열사인 도요타차체에서 근무한 그는 50개의 국가자격증을 가진 정통 엔지니어다. 5년 전 65세 때는 일본에서도 1200명만 갖고 있다는 특급설비관리기술사 자격증을 땄다.

-삼성전자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었나.

“1991년 도시바의 혁신활동을 지도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견학 온 삼성의 이윤우 부회장이 반도체 라인에도 도요타식 설비 관리를 적용하는 걸 보고는 ‘우리에게도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도시바와 한국능률협회의 주선으로 그해 3월부터 삼성전자 컨설팅을 시작했다.”

-처음 삼성 직원들의 반응은 어땠나.

“부천·기흥공장 관리자들과 첫 미팅을 했는데 ‘자동차 출신이 첨단 반도체에 대해 뭘 아느냐’는 분위기였다. 몇 가지 자료를 가져오게 해 조목조목 허점을 짚자 바로 눈빛이 달라졌다. 그럼에도 직원들의 저항은 상당 기간 지속됐다.”

-뭘 바꾸려 했고, 어떤 반발이 있었나.

“당시 반도체 라인은 불량률이 높고 순간 정지나 고장도 잦았다. 근로자는 물론 엔지니어들조차 자신이 다루는 기계에 대해 잘 몰랐다. 문제가 생기면 라인을 세워 놓고 제조사의 기술자가 올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곤 했다. 그래서 시작한 게 근로자 기술 교육이다. 아울러 설비와 공정에 있어 개선해야 할 것들을 찾아 조목조목 적어내게 했다. 자연히 야근이 잦았고 회사를 그만두는 이들도 생겼다. 참다 못한 공장장이 ‘즐거운 혁신은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없다’고 답했다.”

-효과가 나타난 건 언제부터인가.

“근로자들이 낸 개선안이 하나 둘 현장에 반영되면서부터다. 일이 편해지고 생산성도 올라갔다. 그 과정에서 관리자와 엔지니어들의 의식도 바뀌었다. 3년 뒤에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한국 엔지니어들의 기술 수준은 어떤가.

“현장과 실무에 약하다. 실전 훈련을 받지 못한 탓이다. 기업체 교육마저 책 위주인 곳이 많다. 또 외국산 장비를 수입해 쓰다 보니 핵심 지식, 경험에 기반한 기능이 부족하다.”

-공대 출신들은 좀 낫지 않나.

“현장 적응력은 오히려 고졸자가 한 수 위다. 18년간 일하며 뼈저리게 느낀 것이, 한국은 철저한 학벌사회라는 것이다. 직원들에게 왜 동일한 성장의 기회를 주지 않나. 출발점 자체가 달라서야 (고졸자들이) 애사심을 갖고 기술 연마에 매진하기 힘들다. 한국엔 고졸 엔지니어와 대졸 엔지니어의 조직을 아예 분리해 놓은 기업도 많다. 학력 차별을 없애야 기업이 살고 나라가 산다.”

-그럼에도 반도체 산업이 일본을 누를 수 있었던 이유는.

“일본은 설비 관리를 너무 잘한 게 문제다(웃음). 옛 장비를 워낙 잘 보전하다 보니 신제품도 그걸로 만들었다. 반면 삼성은 최신 제품을 최신 설비로 제작했다. 경영진이 용기를 내 과감한 투자를 한 덕분이다. 또 일본 근로자들 사이에선 개인주의가 넘치는데 한국은 집단적 열정이 대단하다.”

-지난해 8월 삼성전자 경기도 기흥 반도체공장에서 정전사고가 발생했다. 회사 측은 배전 설비에 문제가 있었다고만 발표했다.

“사고의 근본 원인은 한국의 뒤떨어진 설비 제작 기술력이다. 지금처럼 일제, 미제 설비들로 공장을 채워서는 급박한 순간에 당할 수밖에 없다.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국내 설비 제작사와 전문 엔지니어를 육성하는 것이다. 이 일을 할 수 있는 건 삼성 같은 대기업 뿐이다. 당장은 불편하더라도 국내 업체에 설비를 맡겨 함께 커가야 한다. 다행히 최근 삼성SDI 등이 라인에 국내 제조사 장비를 넣기 시작했다.”

-도요타 방식은 생산성 극대화를 추구한 나머지 근로자들에게 고통을 준다는 주장도 있는데.

“밖에서 보면 도요타 방식은 지옥이다. 근로자의 움직임을 분·초 단위로 계산해 낭비를 철저히 없애기 때문이다. 어떤 공정에선 양손뿐 아니라 입까지 써야 한다. 그런 방식으로 세계 1등이 됐고, 품질 1위를 지켜 왔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이런 도요타에 입사하길 열망한다. 평생 고용을 보장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도요타의 방식을 잘 익히면 오히려 일이 편해지기 때문이다.”

-70세에도 현역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당신처럼 고교 졸업 후 현장 근로자가 된 한국 젊은이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나.

“도요타에 입사했을 당시 내겐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자본 없이도 할 수 있는 일, 공부를 택했다. 자격증 하나를 딸 때마다 재산이 늘어난 것처럼 기뻤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것도 기술·경험, 그리고 자격증이다. 상황을 탓하기보다 엔지니어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노력하기 바란다. 실력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이나리 기자

◇도요타 방식=세계 정상의 자동차 메이커 도요타의 경영스타일을 뜻한다. 핵심은 현장 작업자의 ‘반성’과 그를 통한 ‘가이젠(改善)’이다. 회사는 문제를 먼저 발견하고 반성한 직원에게 벌이 아닌 상을 준다. 도요타의 끊임없는 가이젠은 30년 연속 원가 절감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GE의 ‘6시그마’와 함께 각국 기업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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