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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버전스 시대, 승자의 조건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3호 43면

젊은 시절 아내와 데이트할 때 영화를 보러 가곤 했다. 30년 가까이 지났지만 그때 봤던 ‘디어헌터’ ‘스타워즈’ 등 명화의 장면들이 지금도 아스라이 떠오른다. 영화를 보고 난 뒤 식사할 곳을 찾아 서울 종로 일대를 헤매던 기억도 난다. 당시 영화를 보러 자주 갔던 종로3가 근처의 단성사·피카디리 등 극장가 주변엔 변변한 식당이 없었던 탓이다.

그런데 요즘은 영화를 보러 가 헤맬 일이 없어졌다. 오히려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너무 많아 고민하게 된다. 멀티플렉스(복합 상영관)가 생긴 덕분이다. 상영 시간보다 일찍 도착하면 서점에서 책을 읽으며 기다리는 지루함을 덜 수 있다. 영화를 보고 난 뒤엔 식당가에서 식사하거나 차를 마시고, 쇼핑을 하고, 피트니스센터에 들러 운동도 할 수 있다. 이처럼 영화관과 쇼핑몰·서점·식당가·피트니스센터 등이 한 공간 안에 있다 보니 세대가 다른 아이들과 영화를 보러 가도 아무 불편이 없다. 도심 곳곳에 이러한 복합 문화시설이 늘어남에 따라 우리 생활 전반에 컨버전스가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컨버전스 현상은 제품이나 서비스에도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얼마 전 지인이 운동화 하나를 보여 주었다. 새 신발 자랑을 하나 싶어 자세히 봤더니 나이키와 애플이 공동 개발한 제품이었다. 운동화에 애플의 MP3플레이어 ‘아이팟’과 연결된 센서가 부착돼 있어 아이팟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조깅을 하면 운동 거리, 속도, 소모 칼로리 등에 대한 정보를 아이팟 스크린이나 헤드폰으로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게다가 근처에 같은 운동화를 신고 운동하는 사람을 무선인터넷으로 연결해 준다고 하니 보통 운동화는 아닌 듯싶었다.

일본의 세계적인 위생 도기업체 토토(TOTO)는 디지털 센서와 의료 자문 서비스를 결합해 체중·혈압·체지방·당뇨 등의 건강 체크와 모니터링이 가능한 욕실 용품을 선보여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아침저녁으로 건강 체크를 할 수 있어 바쁜 현대인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서비스다.

뭐니 뭐니 해도 컨버전스의 대표적인 상품은 휴대전화다. 이제 MP3와 디지털카메라 기능이 들어 있지 않은 휴대전화는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여기에 전자사전·휴대용멀티미디어플레이어(PMP)·내비게이션·디지털멀티미디어이동방송(DMB) 등 각종 기능이 속속 결합되고 있다. 휴대전화 단말기뿐만 아니라 서비스에서도 컨버전스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최근 3세대 영상전화 서비스가 활성화되면서 사고 현장 속보나 실시간 교통정보 등을 동영상으로 제공하는 컨버전스 서비스가 가능해졌다.

컨버전스 제품이 등장하는 것은 편리함 때문이다. 복합 문화공간처럼 하나의 제품 안에 여러 기능을 구현하게 되면 이것저것 따로 들고 다닐 필요가 없어진다. 그러나 최근 나온 첨단 컨버전스 제품 중엔 오히려 고객의 외면을 받는 것도 있다. 자주 사용하지 않는 기능들을 경쟁적으로 합치다 보니 가격은 올라가고, 기능이 복잡해져 오히려 불편하다는 불만이 심심찮게 들리곤 한다. 컨버전스 제품은 고객에게 제공하는 가치가 명확하지 않을 경우 매력을 상실하게 된다. 소비자가 원하는 수준보다 많은 기능을 집어넣을 경우 ‘기능 피로 현상’이 발생해 오히려 단순화하거나 전문화한 경우만 못하기 쉽다. 이러한 문제는 고객에 대한 세심한 관찰과 감성적인 이해 없이 공급자 위주의 기술 편의로 컨버전스를 진행하기 때문에 생긴다. 컨버전스는 기술과 하드웨어 중심에서 벗어나 고객을 향한 새로운 시도라는 관점에서 시작해야 한다. 신기술의 단순한 결합이 아니라 여러 형태의 네트워크를 활용해 고객의 삶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얘기다. 고객이 원하는 것은 새로운 기술이 아니라 ‘새로운 경험과 가치(value)’라는 점을 새겨야 한다.

이처럼 컨버전스가 고도화되는 시대엔 다른 산업과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한 기업이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게 될 것이다. 산업 내 기술 경쟁에서 벗어나 공생·공유의 개념을 확대해 산업 간 컨버전스를 활성화하는 게 필요하다. 그러려면 컨버전스 참여자가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일관성 있는 비전이 있어야 한다. 고객들은 언제(any-time), 어디서나(any-where), 무엇(any-device)을 통해서든 원하고 꿈꾸는 것(any-content)을 누리고 싶어 한다. 고객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진정한 컨버전스를 실현하기 위해 기업·정부·대학 등 혁신 주체들의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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