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오지한국혼전령사>4.잠업지도 李善茂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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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I love Korea and Nepal』(나는 한국과 네팔을 사랑한다).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네팔의 농촌부흥을 위해 한국국제협력단단원으로 활동하는 이선무(李善茂.29)씨의 자취방에는 이런 구호가 붙어있다.그리고 생활신조 세가지.『건강하게 이겨낸다.』『이곳의 모두를 사랑한다.』『배우고 학습함에 게을리하지 않는다.』 李씨가 양잠지도를 하고 있는 네팔 코파시잠업연구소의 허름한 2층건물 한 구석에 마련된 자취방은 정돈되지 못해 오히려 그의 소탈하고 촌스러운 이미지와 잘 어울렸다.
李씨는 거의 자원봉사의 전도사다.아니 자원봉사가 그의 직업이라고 생 각하고 있다.대략 50세정도까지,육체적으로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을 때까지 자원봉사를 하겠다고 다짐한다.남을 돕는 보람과 행복을 평생 누리고 싶다는 바람이다.
李씨의 이같은 결심은 대학때부터 싹텄다.
강원대 발효공학과에 입학한 후 고3때의 은사를 찾은 것이 인생행로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그때 선생님은 자신의 대학생활을 돌이켜보면서 사회봉사활동을 하지 못한 것이 가장 후회스럽다는 말을 인상 깊게 남겼다.특히 불우한 학생들을 위한 야학활동이나 농촌봉사활동을 꼭 하라고 당부했다.
곧바로 야학활동에 들어갔다.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불우청소년들에게 뜻있는 친구.선배들과 함께 공부를 가르쳤다.주위에서는무슨 의식화교육이나 시키나 하는 눈초리로 보는 사람도 있었으나개의치 않았다.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뒤부터는 「파란사람들」이라는 서클을 중심으로 소년소녀가장돕기 활동에 매달렸다.
복학생들이란 으레 취직준비에 정신을 모두 쏟을 터인데 李씨는그렇지 못했다.
『대학생활의 의미를 찾을 곳은 봉사활동밖에 없었습니다.우리의주변에 따뜻한 정에 굶주려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제약회사도 다녀보고 공무원생활도 잠시했다.그러나 생활에 매달리고 시간이 자유롭지 못해 봉사활동을 하기에 많은 제약이 있었다.게다가 공무원생활을 하는 중에는 뇌물의 유혹에도 빠져『있을 곳이 못된다』는 생각에 미련없이 그만뒀다.
그리고 92년 해외자원봉사단에 지원했다가 낙방해 「재수」끝에93년 봉사단에 입단,그해 9월 네팔에 왔다.
그가 이곳에서 양잠지도를 하게된 사연은 경기도 가평에서 부모가 하고 있는 양잠업을 어릴 때부터 도운 게 인연이 됐다.자연스럽게「뽕따는 총각」이 된 것이다.
처음 네팔에 와서 李씨를 좌절케 한 것은 이곳 사람들이 체질적으로 외국의 원조에 길들여져 있어 스스로 개선하려는 의욕이 없었던 점이다.누에를 잠재우고 깨우는 요령,뽕을 먹이는 시기와양,습도조절,누에고치를 삶는 방법까지 어느 하나 제대로 된 분야가 없었다.
李씨가 요령을 이야기해 주어도『우리는 지금까지 이렇게 해왔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며 오히려 귀찮아하기도 했다.어떻게 하든 실만 나오면 되지 않느냐는 반응이었다.李씨는 당장의 양잠기술보다는 이들의 의식을 바꾸는 것이 더 급한 일 이라고 생각하고 양잠농가를 돌아다니며 기술지도와 함께 정신교육을 시켰다.
한국이 오늘같이 잘 살게 된 것은 새마을정신이 있었기 때문에가능했다고,한국의 농촌도 불과 얼마전까지 지금 네팔의 농촌처럼가난했지만 「잘살아 보세」정신으로 이제는 가난을 벗게 되었다고알려줬다.
양잠기술을 개선해주려는 李씨를 처음에는 냉랭하게 대했던 농민들도 「잘사는 방법」을 전도하는 李씨의 말에 점점 솔깃해했다.
『지금의 양잠기술로는 돈을 벌지 못한다.기술을 개선해야 잘살수있다』고 이야기해주자 농민들은 그때서야 李씨의 지도를 따라 양잠기술을 하나씩 배워 나가기 시작했다.
이곳 잠업연구소에서는 30t의 누에고치로 연간 5t의 명주실을 생산한다 .제대로 한다면 7~8t은 생산해야 한다.그리고 생산한 명주실도 실이 끊긴 것이 많아 값도 반값밖에 받지 못하고 있었다.
李씨는 누에고치를 삶기 전에 번데기를 죽이는 기술,누에고치를삶고 감는 방법의 문제점들을 하나하나 개선해 나갔다.그의 말대로 명주실의 생산성이 날이 갈수록 좋아졌다.
잠업연구소에서 李씨와 함께 일하고 있는 산업곤충학자 이스와르리잘은 『李씨가 전해준 기술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잘살 수 있다는 생각을 불어넣어 준 것』이라고 말했다.
李씨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한국이 후진국을 도울 적임자라고생각하고 있다.못살았던 경험과 「새마을정신」이 살아 있기 때문이란다. 네팔에서의 봉사활동을 통해 비로소 어른이 된 것 같다는 李씨는 앞으로 여건이 허락하는 대로 자원봉사활동을 계속할 것이라고 했다.그리고 많은 후배들에게 봉사활동의 기회를 가져 보라고 꼭 권하고 싶다고 했다.
[코파시(네팔)=李元榮특 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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