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PI 총회 서울개최의 의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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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국제언론인협회(IPI)총회가 서울에서 열린다는 것은 우리나라도 이제 언론자유의 「감시대상」에서 벗어나 이를 감시할 「파수꾼」의 자격을 갖추었다는 얘기다.2차대전 직후인 51년 창립당시만 해도 IPI는 언론인 친목단체의 성격이 강했 다.그러나 언론인으로서 세계평화에 이바지하고자 활동하는 과정에서 전세계의언론자유확보가 시급하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IPI는 언론자유운동을 본격화했다.
IPI는 언론자유정신에 입각,▲인권의 보호▲언론자유증진및 수호▲국경을 초월한 뉴스에의 자유로운 접근▲언론인의 신변안전및 자유로운 보도활동의 확보▲언론의 질적인 향상▲각국 국민간의 이해증진등 6대 목표를 추구해왔다.구체적으로 IPI 는 언론을 탄압하는 정부에 대해 공개항의하고현지조사단을 파견해 실상을 전세계에 폭로하는 한편 매년 「세계 언론자유현황」이라는 연보를 통해 각국의 언론상황을 점검해왔다.
우리나라는 56년부터 회원으로 가입하고자 IPI본부에 신청서를 냈다.그러나 번번이 「한국은 언론의 자유가 없기에 자격이 없다」는 이유에서 거절당해야했다.그러다가 59년 한국일보 창업자인 故 장기영(張基榮)씨가 개인자격으로 가입할 수 있었다.그렇지만 공식기구인 한국위원회는 설립될 수 없었다.
한국위원회 설립을 인정받은 것은 60년 4.19혁명의 결과였다.4.19로 이승만(李承晩)정권이 물러나고 경향신문이 복간되는등 일시적으로 언론의 자유가 이뤄지자 60년 12월에 열린 IPI이사회는 한국위원회의 창립을 승인했다.그래서 한국위원회는61년 2월 장기영씨등의 주도로 발족됐다.
그러나 5.16쿠데타가 나면서 한국은 감시대상국으로 전락했다.IPI는 항상 한국에 대해 언론의 자유를 촉구하는 입장이었고한국정부는 IPI를 껄끄러운 단체로 기피해왔다.IPI는 61년9월 세칭 「민족일보사건」 당시 혁명정부에 의해 체포된 언론인들의 조기석방등 관대한 처분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내기도 했으며75년 동아일보 광고탄압 사건 당시에는 박정희(朴正熙)대통령에게 규탄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이같은 입장은 80년대말까지 계속됐다.그러다가 한국에 대한 인식이 바뀐 것은 92년 부다페스트 회의에서 한국위원회측의 「한국 언론상황에 대한 리포트」를 보고받으면서부터.이후 IPI는한국 언론상황의 자유로움을 확인한 뒤 93년 베 네치아 총회에서 서울총회개최를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한국총회 개최가 결의된 것은 한국의 언론자유신장 때문만은 아니다.IPI는 항상 뉴스의 중심,세계평화의 현장에서 총회를 개최해왔다.한국이 뉴스.세계평화의 현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유일한 분단국」이라는 현실 때문이다.IPI는 분단 국 한국에서총회를 개최함으로써 냉전의 유산에 대한 세계언론의 관심,나아가전세계인의 관심을 환기하고자 서울총회를 결정한 것이다.
그래서 이번 총회의 세미나.워크숍 주제도 「한국의 약진」「독일통일의 교훈」「세계언론상황 보고」등으로 정했다.
〈吳炳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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