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러시아 대선서 당선 확실한 메드베데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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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호 11면

지난달 28일 모스크바 크렘린 궁에서 열린 회의에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제1부총리(왼쪽)가 푸틴 대통령을 응시하고 있다. 메드베데프는 푸틴이 이끄는 39통합 러시아당39의 후보로 출마해 압승할 것이 확실시된다. [모스크바 로이터=연합뉴스]

“권력의 평화적 이양은 역사적으로 희귀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흔합니다. 우리는 간결한 취임선서로 유구한 전통을 확인하는 동시에 새로 출발하는 것입니다.” 2001년 1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취임사 서두에서 꺼낸 말이다. 미국 민주주의의 핵심을 드러내는 발언이다. 그 발언에는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는 선거’와 ‘헌법 준수’라는 단서가 따라붙는다. 민주주의의 이런 원칙들은 다른 선진국들도 공유한다. 그러나 2일 대통령 선거를 치르는 러시아 정국을 놓고 국내외에선 절반의 민주주의밖에 실현되지 않고 있다는 비난이 쏟아진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3연임 금지’라는 헌법 조항을 준수했지만 선거의 공정성을 의심받기 때문이다. 세계화 시대에 민주주의 원칙을 앞세운 정치적 비난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게 러시아의 고민이다.

‘上王’ 푸틴의 꼭두각시 벗어날까

미국에서는 지금 ‘변화’를 지향하는 선거전이 한창이다. 반면 러시아는 ‘권력 계승’을 위한 선거가 실시된다. 2000년 취임한 푸틴 대통령은 1990년대 국가적 경제위기를 극복했다고 자부한다. 후계자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는 푸틴의 국정운영 방향을 유지하겠다고 공언했다.

푸틴은 24일 “나는 권력에 중독되지 않았다. 나는 한번도 3선 개헌의 유혹을 느낀 적이 없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그는 꼭두각시 대통령을 조종하는 실세 총리가 되려고 한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는 “소련의 붕괴는 20세기 최고의 지정학적 참사”(2005년 4월 25일)라며 ‘강한 러시아’의 부활을 외치고 있다. 이번 대선에 출마한 극우주의자 블라디미르 지리노프스키(62) 자유민주당 후보나 최대 야당인 공산당의 지도자 겐나디 주가노프(64)가 서구 사회가 바라는 대안이 되기는 더욱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서구는 푸틴 깎아내리기에 열중하고 있다. 미 공화당의 유력 대선 후보인 존 매케인은 “서방 선진8개국(G8) 모임에 푸틴을 초청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힐러리 클린턴은 “KGB 요원이던 푸틴에게는 영혼이 없다”고 압박했다.

권력은 부자(父子)간에도 공유하기 힘들다는 게 동서고금의 사례다. 푸틴이 ‘영의정’ 자리로 내려앉아 ‘상왕(上王)’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을까. 의견이 양분된다. 가능하다고 보는 쪽은 메드베데프의 발탁 배경을 본다. 그는 푸틴이 1990년대 초부터 키워준 인물이다. 만만해 보이기에 치열한 물밑 경쟁을 이기고 푸틴의 낙점을 받을 수 있었다. 메드베데프의 권력 기반은 취약하다. 요즘 그는 부쩍 푸틴 흉내를 낸다.

푸틴처럼 단어의 첫 음절에 강세를 넣고 걸음걸이까지 따라 한다. 그의 키는 1m62㎝밖에 되지 않아 푸틴(1m70㎝)보다 작다. 변호사 출신인 그는 정치인이라기보다 무색무취한 행정가 쪽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래서 그는 푸틴이 제시하는 다음과 같은 역할 분담에 만족할지 모른다. “대통령은 헌법의 보증인이다. 그는 국내외 정책의 주요 방향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 최고의 행정권을 지닌 기관은 총리를 수장으로 하는 러시아 정부다. 그래서 권력은 드미트리와 내가 나눠 가질 만큼 충분하다.” 푸틴 자신은 경제·행정 분야에 집중할 것이기 때문에 메드베데프에게 명령할 일도, 싸울 일도 없다는 것이다.

서구 언론은 두 사람이 ‘좋은 경찰, 나쁜 경찰(good cop, bad cop)’의 역할분담 전략을 구사할 것으로 예상한다. 푸틴이 미국·서유럽에 대해 강공책을 쓰고 메드베데프는 민주주의, 사유재산, 중산층 육성, 언론 독립 등을 강조하며 서구의 입맛에 맞는 배역을 맡는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메드베데프가 5월 7일 대통령에 취임하면 장기적으로 푸틴과의 권력투쟁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점친다. 알렉산드르 볼로신 전 대통령 행정실장은 충돌 끝에 결국 메드베데프가 권력을 장악하리라고 본다. 주변 사람들이 둘 사이를 충동질할 수도 있다.

메드베데프도 사실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다. 권력의 중심부에 머물면서도 자신의 원칙을 고수해 때를 묻히지 않았다. 비록 푸틴이 후원해준 덕분이지만 메드베데프의 인기도 만만치 않다. 권력을 잡으면 성격도 바뀔 수 있다. 막상 집권하면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그는 26일 바시키르공화국에서 연설하던 도중 문이 열려 주위가 소란스럽자 한 사람을 지목하며 “어이, 당신, 문 좀 닫아. 당장”이라고 명령하는 위세를 보여줬다.

두 사람 사이에 권력투쟁이 발생한다면 아킬레스건은 바로 부패 의혹이다. 서구 언론은 푸틴의 재산 규모가 400억 달러에 달한다고 보도한 적이 있다. 그럼에도 메드베데프는 대통령 당선 이후 부패와 싸우겠다고 공약했다. 부패의 정점에 푸틴이 있다는 것을 그는 모르고 있을까. 메드베데프는 생활난 때문에 사기가 땅에 떨어진 군(軍)을 우호 세력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2000년 이후 군사비 지출은 600% 증가했지만 12만 가구의 군인 가족들이 임시 막사에서 살 만큼 척박한 현실이다.

푸틴과 메드베데프는 당분간 러시아를 쌍두마차 체제로 이끌 전망이다. 표준시간대가 11개나 되는 대국 러시아의 국가 문장은 머리가 두 개 달린 ‘쌍두 독수리’다. 독수리의 머리는 각각 동쪽과 서쪽을 향하고 있다. 푸틴과 메드베데프가 쌍두 독수리처럼 반대 방향을 볼 것이냐, 쌍두마차처럼 한 방향으로 달릴 것이냐에 국내외 시선이 쏠리고 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백악관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러시아의 새 지도자와 개인적 유대 관계를 맺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그러면서 “올 7월 일본 훗카이도에서 열리는 G8 정상회의에서 누가 러시아를 대표하는지 지켜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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