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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災공화국’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1호 16면

국내 언론사상 사건담당 기자가 가장 바빴던 해는 1993년이었다. 육(구포 열차 전복)·해(서해 훼리호 침몰)·공(해남 아시아나기 추락)에서 대재난이 잇따라 일어났다. 대형 사고가 뻥뻥 터지자 사건기자 사이에서 이런 시답잖은 시나리오가 나돌 정도였다.

“총천연색으로 터질 사고는 다 터졌다. 앞으로 남은 유형은 항공기가 떨어지면서 열차를 덮치고, 열차가 다시 유람선을 덮치는 복합사고밖에 없다.”

“부실공화국의 오명에서 벗어나자”는 구호도 신문지상을 덮었다. 어느 정치인은 “건국하는 심정으로 나라 기초를 다시 세우자”고까지 했다. 대학생이 이런 소리를 했다면 용공세력으로 몰릴 만한 발언이었다. 수많은 안전관리 대책이 쏟아져 나왔음은 물론이다. 구호·대책만 보면 더 이상 어처구니없는 인재는 없을 듯했다. 하지만 다 알다시피 그렇지 않았다. 닮은꼴 사고가 해마다 어김없이 되풀이됐다. 바로 얼마 전 숭례문이 불탔고, 이 글을 쓰는 3월 1일 아침에도 김천의 페놀수지 공장에서 폭발 사고가 나 10여 명이 사상했다는 뉴스를 듣고 있다.

참사 이후 각종 정책이 법으로 만들어지고 소방방재청 같은 기구도 탄생했다. ‘하드웨어’ 대책은 수립된 것이다. 그런데도 왜 닮은꼴 사고는 반복된 것일까. 이번 스페셜리포트 취재팀이 탐사한 핵심 내용이다. 취재팀은 1993년 이후 지난해까지 벌어졌던 20건의 재난사고 백서를 추적하면서 이런 결론을 내렸다.

“재난 사례를 진지하게 연구해 그 원인을 찾아내 현장 매뉴얼을 만드는 ‘소프트웨어’ 대책은 수립되지 않았다.”
백서가 없는 경우가 태반인 데다 만들었다는 백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백서·사고보고서를 체계적으로 모아 비치해 놓은 기관도 없었다. 취재가 끝날 무렵 중앙SUNDAY가 가장 많은 백서를 갖고 있는 기관이 됐다면 믿겠는가.

실패는 지식화돼야 한다. 지식이 또 다른 실패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사고를 연구하고 분석해 자세한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공직자들이 “대충 마무리하고 끝내자”는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 일본의 ‘실패 지식 데이터베이스(http://shippai.jst.go.jp)’를 소개하고자 한다. 과학기술진흥기구가 각 분야의 실패 사례 1100여 건을 분석해 놓은 인터넷 사이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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