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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서남연합대학<上> 戰時에 8년간 문 연 중국 최고 학부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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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호 38면

서남연합대학 보행단이 행군하는 모습. [김명호 제공]

1937년 7월 베이징 교외에서 중·일 무력충돌이 벌어졌다. 중국 국민정부는 일본에 전면전을 선포했다. 그러나 중국 대학들은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베이징대학 지하실은 일본 헌병대의 고문 장소로 변했다. 중국 최초의 사립대학인 톈진의 난카이(南開)대학은 한 채를 제외한 모든 건물이 폭격으로 주저앉았다.

수천 년간 교육을 중시하던 민족이었다. 최고 통치자 장제스의 전시 교육정책은 간단명료했다. ‘전시일수록 교육은 평소와 다름없어야 한다.”

국민정부는 일본군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70여 개 대학을 이전했다. 국립인 베이징대학과 칭화대학, 사립인 난카이대학도 후난성 창사(長沙)로 이전했다. 이들은 연합에 합의해 1937년 11월 1일 악록서원(岳麓書院)에 임시대학을 설립했다. 교수 148명, 학생 1452명이었다.

그해 말 수도 난징이 함락됐다. 일본군의 창사 공습은 무자비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이었다. 임시대학은 더 안전한 자리를 물색했다. 서남에 위치한 윈난성 쿤밍(昆明)으로 이전을 결정했다. 기후가 사철 봄날이었고, 철도를 이용한 해외 왕래가 수월한 곳이었다. 전시 교육장소로 최적이었다.

1938년 2월 중순 이전이 시작됐다. 학생 875명이 지원했다. 용감하고 성격 급한 학생들은 군에 지원하거나 낙향했고, 꿈을 좇는 학생들은 혁명 성지 옌안으로 떠난 뒤였다. 체력이 약한 여학생, 교직원 및 그 가족들은 기차로 광둥을 거쳐 홍콩에 도착한 뒤 다시 배를 타고 베트남을 경유해 쿤밍에 도착했다.

남학생 244명과 교수 10여 명은 보행단을 조직했다. 민심 파악, 풍토 조사, 표본 채집, 신체 단련이 목적이었다. 후난성 정부는 녹색 군복과 일용품을 제공했고, 현역 육군 중장이 직접 이들을 인솔케 했다. 2월 19일 초저녁 보행단은 악록서원을 출발해 상강(湘江)을 건넜다. 900여 년 전 주희(朱熹)가 일과를 끝낸 뒤 악록서원으로 가기 위해 밤마다 배를 저으며 건너던 강이었다.

대도시의 대학생활에 익숙했던 보행단은 행군 과정에서 상상도 못했던 시련을 겪었다. 모든 악조건이 이들을 엄습했다. 일본군이 퍼부어대는 폭격을 목격했고 악천후에 시달렸다. 후일 저명한 철학자로 성장한 런지위(任繼愈)는 “상아탑을 나온 우리는 처음으로 조국을 인식했다. 얼마나 빈곤하고 큰 나라인지를 그제야 알았다. 평소 사람 축에 끼지 못한다고 여겼던 아편 장수나 하층민도 나라 잃은 백성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침략자에 대한 그들의 분노와 불복종의 기세는 우리를 교육시켰다. 우리는 이들을 아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보행 도중 철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했다. 단순한 보행단이 아닌 이동하는 대학이었다.

시인 원이둬(聞一多)는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을 화폭에 담으며 조국이 처한 현실에 넌덜머리를 냈다. ‘승리하는 날까지 수염을 깎지 않겠다’고 결심했고 가는 곳마다 민가를 수집하며 하층민의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힘에 찬탄을 금치 못했다. 68일에 걸친 3500리의 장정이 끝난 뒤 인생관이 완전히 바뀐 그는 쿤밍에 도착한 후부터 평소 즐기던 산책도 걷어 치워 버렸다.

4월 28일 보행단은 쿤밍에 도착했다. 먼저 와 있던 여학생들이 꽃다발을 목에 걸어 주었다. 이날 서로 눈이 맞아 많은 커플이 탄생했다. 이들이 연출해낸 수많은 드라마는 후일 ‘미앙가(未央歌)’라는 장편의 거작을 탄생케 했다.

장정 도중 함께한 체험은 상이한 전통을 자랑하던 세 대학의 교수와 학생들을 융합시켰다. 가르치고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파악한 뒤인 1938년 8월 국립 서남연합대학은 정식으로 설립을 선포했다. 전란 속에 태어나 8년간 존속한 유랑대학이었다. 그러나 중국 역사상 최고의 학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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