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기업인, 징벌보다 참회 기회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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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1999년 김대중 대통령이 대우(大宇) 처리에 대한 의견을 물은 적이 있다. 나는 시기가 너무 늦었다는 점과 기업정리는 금융기관에 맡기고 대통령은 정치개혁, 특히 정치자금 관행과 정경유착에 의한 부패의 단절에 전념하는 것이 부실 금융.부실 기업을 막는 첩경이라고 답했었다. 대통령에게까지 돈을 바쳐도 사업에 도움이 되지 않고 정치자금 안 내도 손해보지 않는다는 것을 기업인들이 실감하게 되면 정경유착은 저절로 정리되게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대통령이 대기업 주인들과 자주 만나는 것도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비판을 했다. 지금 경제위기 같지만 사실은 정치개혁 안 한 데서 오는 부패위기라는 사실을 강조했었다.

지금 우리는 "6.25 이후 최대 국란"이라고 대통령 스스로 규정했던 IMF 구제금융 위기를 과연 극복한 것인가 하는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그간 검찰과 특별검사들이 밝혀내고 있는 권력 정당 정치인의 부패행태를 보면 입으로는 6.25 이후 최대 국란이라고 국민에게 경종을 울리면서도 두 정권에 걸쳐 정작 청와대와 대통령 후보들과 국회.정치인들의 정치자금 관행은 큰 변화가 없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구 정치인.신 정치인.386 정치인.3金 정당. 3金 이후 정당 모두 예외가 드물다.

외환위기는 넘었으나 국내 신용위기로 대체되고 1인당 국민소득은 9년간 제자리 걸음이며, 고용과 소득 격차는 더욱 악화하고 제조업의 공동화.사회 해체.마음의 공동화가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다.

최근 가슴아팠던 경험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한국에의 투자유치를 위해 선진국에 간 기업인들과의 대화다. 낮에 공식 석상에서는 한국이 외국인 투자유치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고 설명하고는 저녁에 한국인끼리 모여서는 입을 모아 합창하듯이 도저히 국내에선 장사를 못 하겠는데 중국.인도.베트남.동유럽 … 어디로 가야 좋으냐는 질문.자문을 받은 일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장사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고 한 약속은 누가 했던가.

둘째는 서울과 베이징(北京)의 공식 석상에서 지금까지는 한국을 배웠으나 이제부터 한국이 중국을 배우라는 중국인들의 충고를 듣는 일이었다. 애매모호함과 이중성을 특징으로 하는 중국인에게서 이런 직설적 충고를 듣는 것은 한.중(韓.中) 위치의 역전을 실감케 한다.

지금 기업인들의 마음, 기업의 실체를 제대로 읽으려는 노력이 부족하다. 오래된 나쁜 관행을 끝내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법치.징벌에 의한 개혁이다. 제도를 개선하면 효과가 있는 분야는 법치 쪽이 옳다. 또 하나는 윗사람이 모범.전범을 보임으로써 밑의 사람.관련자들이 스스로 변화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정당.정치인에게는 억제력, 징벌에 의한 개혁의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 검찰에겐 비판도 있고, 기대도 있다. 정경유착의 또 하나 당사자인 기업.기업인에게는 모범을 제시하고 반성과 참회의 기회를 주는 것이 좋다. 대통령을 포함해 정치권이 정치개혁, 돈 안 드는 선거와 정당, 투명한 국회 운영을 보여줌으로써 기업이 정경유착의 유혹과 유인을 원천적으로 단절하는 것이다.

그리고 과거의 과오에 대해서는 반성과 참회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5.16 후 부정부패 처리 진행과정에서 당초에는 기업인 구속과 형사처벌이었지만 오히려 이들을 풀어주고 외자유치 책임제로 전환함으로써 경제성장의 엔진에 불을 붙인 것도 참고할 만하다. 그런 반성과 참회의 기회에서 우리나라 대기업과 이들이 참가한 경제단체는 특히 정경유착 단절과 정치개혁.경제개혁에 자발적.집단적 의지의 실천을 보여야 한다.

김진현 세계평화포럼 이사장.前 과기처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