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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칭화대학이 배출한 최고의 才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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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호 38면

1949년 겨울 뤄룽지(왼쪽)와 푸시슈.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유일한 사진이다. [김명호 제공]

칭화(淸華)대학은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그러나 재자(才子) 소리를 듣는 사람은 세 명에 불과하다. 대표적인 사람이 뤄룽지(羅隆基·1896∼1965)였다. 학생 시절부터 고문(古文)을 적재적소에 인용한 예리하고 미려한 문장과 연설은 필적할 자가 없었다. 그가 연설할 때 그림자가 아름다웠다는 말을 할머니에게 들었다는 사람이 많다.

미국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던 중 해럴드 래스키에게 심취해 영국으로 건너갔다. 다시 돌아와 컬럼비아대학에서 학위를 마치기까지 7년간 서구사상을 폭넓게 접촉했다.
1928년 귀국해 상하이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후스(胡適) 등과 『신월(新月)』을 창간했다. 문학 간행물이던 『신월』이 인권·법치·자유의 진지가 된 것은 순전히 뤄룽지 때문이었다.

이성관계에서도 진가를 발휘했다. 런던대 시절 화교 거상의 딸인 장순친(張舜琴)과 결혼했다. 소박하고 조용한 변호사였다. 주일마다 교회에 갔지만 뤄룽지는 문턱에도 가지 않는 등 취향이 달랐다. 부인보다는 서정시인 쉬즈모(徐志摩)에게 이혼당한 장야오이(張幼儀)에게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후베이(湖北) 미인 왕여우자(王右家)와 가까워졌다. 왕은 뒷일을 생각하지 않는 성격이었고 뤄룽지는 감정에 관해서는 다원론자였다. 두 사람은 익세보(益世報)에 함께 근무했고 생활은 베이징에서 했다.

베이징과 톈진을 오가며 여류시인 쉬팡(徐芳)과도 염문을 뿌렸다. 1937년 한 해에 무려 47통의 편지를 쉬팡에게 보냈다. 쉬팡의 부모가 뤄에게 경고하는 바람에 둘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쉬팡은 말년에 한 통의 편지를 공개하며 분실한 나머지 편지들을 아쉬워했다.

왕여우자와 함께 우한(武漢)에 갔을 때 국공 합작으로 두 당의 요인들이 집결해 있었다. 뤄룽지가 나타나자 우한이 술렁거렸다. 부인과 딸 단속에 바빠진 사람이 많았다.

딸도 없고 혁명가 부인을 둔 저우언라이(周恩來)만이 태연했다. 뤄가 서남연합대학 교수로 부임하기 위해 우한을 떠나자 다들 안심했다. 서남에서 뤄룽지는 왕여우자와 정식으로 결혼했지만 곧바로 이혼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최초의 사법부장인 스량(史良)도 뤄룽지의 연인이었다. 항일전쟁 시절 전시 수도 충칭(重慶)에서 두 사람은 모두가 묵인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푸시슈(浦熙修)가 나타나는 바람에 스량은 뤄룽지를 포기했다. 푸시슈는 펑더화이(彭德懷)의 처형으로 충칭 신민보(新民報)의 취재부 주임이었다.

1946년 1월 정치협상회의(구 정협) 대표 38명을 취재하던 중 뤄룽지에게 넋을 잃었고 남편과 이혼했다. 펑더화이의 반대로 뤄와의 결혼은 성사되지 못했다.

중공 정권 수립 후 뤄룽지에게는 삼림공업부장, 전인대 대표, 민주동맹 부주석 등 여러 개의 직함이 주어졌다. 푸시슈도 문회보(文匯報)의 베이징사무소 주임으로 자리를 옮겼다. 두 사람은 왕푸징(王府井) 인근의 같은 골목에 살았다. 푸시슈가 한국전쟁 취재차 떠나 있던 기간을 빼고 사흘이면 이틀을 만나는 사이로 발전했다.

1957년 반우파 운동이 시작되자 뤄는 우파 두목으로 지목됐다. 공직을 박탈당했고 직급도 4급에서 9급으로 조정됐다. 비판대회에 출석한 푸시슈는 뤄룽지를 호되게 비판했다. 10년에 걸친 두 사람의 인연은 그날로 끝을 맺었다. 뤄룽지의 문전은 쓸쓸해졌지만 캉유웨이(康有爲)의 손녀와 인권운동가 왕리밍(王立明) 등은 아랑곳없이 뤄를 챙겨줬다.

뤄룽지는 학문, 외국어, 정치적인 식견이 탁월했고 달변이었다. 춤도 잘 췄고 무슨 옷을 입어도 잘 어울렸다.

그러나 중국 천지에 이런 사람은 널려 있었다. 그의 여자친구들은 한결같이 중국인명사전에서 한 부분을 차지하는 사람들이었다. 그것도 그냥 알고만 지내는 사이가 아니었다. 재자 소리는 아무나 듣는 게 아니었다. 뤄룽지야말로 재자의 조건을 완벽히 갖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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