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경청, 인내, 그리고 소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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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새 대통령을 맞으며 이런저런 주문의 목소리가 많이 나옵니다. 그만큼 기대가 각별하기 때문이겠지요.

대통령의 덕목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 저는 그중에서도 ‘경청(傾聽)’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사실 남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상당한 노력, 무엇보다도 참을성이 없어서는 잘 들을 수가 없습니다.

옛날 얘기 하나 하지요. 예전에 한 선비가 과거에 급제해 한 고을의 수령으로 내려가게 되었답니다. 부임 전 사당 참배도 하고 노모께 하직인사도 할 겸 고향을 찾았지요. 노모께 한 말씀 부탁하자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일을 할 때는 항상 참을 인(忍)자를 세 번만 생각하라고. 지당하신 말씀 명심하겠노라며 선비는 부임 길에 오릅니다. 동구 밖을 막 나서려는데 집에서 하인이 달려와 노모가 보자 한다는 전갈을 해왔습니다. 뭘까 해서 다시 돌아가니 노모께서 다시 그저 참을 인자 세 번만 생각하라는 말을 또 하는 것이었습니다. 약간 부아가 났지만 명심하겠노라며 다시 길에 나섰지요. 이번엔 한 십 리쯤 가 잠깐 쉬고 있는데 다시 노모가 보자 한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무슨 급한 일이 생겼나 해서 다시 집으로 갔지요. 그러자 노모께서 아까 한 말, 참을 인자를 명심하라고 다시 당부를 합니다. 선비는 화가 났지요. 아니 그 말 또 하려고 부르셨느냐고. 제가 어린아이도 아니고 이제 어엿한 한 고을의 수령인데. 그러자 노모께서 이렇게 말하십니다. 그것 봐라 세 번 참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크게 깨우친 선비는 노모의 말을 명심하고 선정을 폈다는 그런 얘기입니다.

남의 말을 듣는 데는 정성이 필요하고, 그 바탕은 참는 겁니다. 좋은 말도 여러 번 들으면 짜증이 나는데 싫은 말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소리도 참고 들어야 합니다. 판단은 그 다음의 문제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실패가 바로 여기서 비롯됐습니다. 끊임없는 편 가르기 속에 스스로는 이념적 철옹성을 구축했는지 몰라도, 국민의 눈에는 저들의 요새에 스스로 갇혀 있는 것으로밖에 비치지 않았습니다. 언론은 중요한 소통의 수단입니다. 제각각 나름의 특성을 갖고 있어 여러 여론을 접할 수 있는 통로입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그 다양성에 주목하기보다는 자신의 뜻과 부합되는 것을 가려 듣고 보는 방향을 선택했습니다. 이른바 보수 언론이 맘에 안 든다고 진보 언론에 기대고, 그도 안 되면 방송과 인터넷매체에 구애하고, 그것마저 안 되니 아예 기자실을 없애고 스스로 장문의 글을 써 인터넷에 올리고 하는 식으로 자꾸 안으로 안으로 감겨드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수소·헬륨을 다 태우고 자체 중력을 못 이겨 오그라드는 별의 마지막 모습 같다 할까요.

듣는 게 안 되는데 소통이 이뤄질 리 없습니다. 노 대통령을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조차 가장 안타까워하는 부분도 바로 소통의 부재였습니다. 스스로 도덕적·이념적 자만심에 빠져 남의 얘기를 들으려 하지 않는 것, 집권 초기부터 내비쳤던 그런 성벽은 5년 내내 계속됐고, 그것은 결국 정치적 자멸을 초래했습니다.

여건이 어려울수록 소통의 중요성은 더욱 커집니다. 새 정부 최대의 과제인 ‘경제 살리기’의 여건은 결코 좋지 않습니다. 안팎의 악재가 쌓여 있고 한·미 자유무역협정과 춘투(春鬪) 등 사회적 합의를 통해 극복해야 할 과제들은 산적해 있습니다. 이럴 때 잘 듣고, 잘 참는 힘이 필요합니다. 설사 원하는 것을 못 이뤄준다 하더라도 참고 들어줬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됩니다. 며칠 전 타결된 정부조직법 협상 과정을 보며 적잖은 사람들이 걱정의 말을 하는 걸 들었습니다. 일방적으로 내각 명단을 발표하고 곧바로 워크숍을 갖는 모습이 자칫 독선과 오기의 몸짓으로 비치지 않을까, 마지막까지 좀 더 참는 게 좋았지 않았을까라고. 물론 통합민주당의 책임도 있겠지요. 하지만 듣고 참는 건 힘있는 쪽에서 해야 합니다. 그게 진정한 힘이고 그런 바탕 위에서 명분도 더 뚜렷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잘 듣고, 잘 참으며 국민과의 소통을 통해 통합을 이뤄나가는 대통령이 되시길 기대합니다.

박태욱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