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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이양기의 신·구 권력 격돌

중앙일보

입력

뉴스위크“사람들은 ‘꿈의 계획’이라고들 불렀다. … 불가능한 이유는 수백 가지였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내가 믿는 것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는 소박한 신념과 ‘하면 된다’는 열정과 의지가 전부였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이 2005년 발매한 ‘청계천은 미래로 흐른다’의 표지에 실린 글이다.

나아가 청계천 사업 결행의지와 당시의 불투명한 정황을 책 속에서 이렇게 썼다. “왜 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고 말하는가. 자기 할 일을 다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리라고 했다.… 진정성을 가지고 열심히 한다면 반드시 좋은 결과를 맺는다는 게 바람 속을 거슬러 걷듯이 살아온 나의 삶에서 얻은 교훈이다.”

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영어 공교육 강화를 제2의 청계천 프로젝트로 규정했다. 목표가 옳고 분명한 만큼 당장의 반발과 부작용은 감수하겠다는 의지가 물씬 배어나온다.

이동관 인수위 대변인은 “청계천이 완성되었을 때 국민 모두가 감동을 받았듯이 영어 공교육 강화는 국민에게 새로운 꿈을 드리는 희망 프로젝트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인수위가 밝히는 영어정책은 파격일색이다. 이경숙 인수위원장은 모든 과목을 영어로 강의하는 이른바 영어몰입교육을 시사했다.

또 병역의무자중 영어교육요원을 선발해 군대 대신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방안도 언론에 보도됐다. 영어 잘하면 군대 안 간다는 방침이 알려진 1월 28일 포털 사이트 다음의 자유토론방(아고라)에는 “인수위 ‘뭔가 보여주겠다’라는 강박관념을 버려라”라는 글이 올랐다.

ID를 홈런왕이라고 밝힌 한 네티즌은 영어몰입교육의 맹점을 지적하면서 “지금 당장 뭔가 보여주지 않아도 되므로 국민의 살림, 정서를 살펴달라”고 타일렀다. 글의 취지에 공감한 사람은 사흘 만에 795명에 달했고 반대한 사람은 6명에 그쳤다.

인수위는 일반과목도 영어로 수업한다거나 영어 잘하면 군대 안 간다는 보도 내용을 부인하는 등 한발 물러섰다. 중앙일보 최근 여론조사에서 영어교육강화 방안은 찬반이 47.4% 대 46.8%로 팽팽했다. 하지만 전교조가 한길리서치 연구소에 조사를 의뢰했더니 응답자의 76%가 새 교육정책으로 사교육비 부담이 늘어난다고 답했다.

따라서 교육양극화가 심화된다는 의견도 75.6%에 달했다. 현란한 영어정책에 피로를 느낀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인수위는 영어 공교육 공청회를 열면서 찬성하는 전문가들 위주로 불러모아 반 쪽짜리 여론수렴작업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인수위 내부에서조차 “ 인수위 정책이 옳다 해도 학부모들의 불안감을 자극한 측면은 있다”는 자성도 나왔다.

영어교육정책뿐만 아니라 자립형사립고 확대, 학교별 정보 공개, 수능등급제 폐지나 점수제 회귀 등 교육 관련 정책은 발표될 때마다 크고 작은 소동으로 번졌다. 또 유류세·이동통신비 인하, 각 부처 10% 예산절감 등 인기영합적 정책은 얼마 못 가 거둬들이거나 고쳐지곤 했다.

그러다 보니 인수위가 정권인수가 아닌 정부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는 기관이냐는 비아냥까지 나왔다. 강원택 숭실대 교수는 “노무현 정부와 차별화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당선인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원인”이라고 풀이했다.

역대 인수위에서 활동한 사람들의 눈에도 지금 인수위는 불안하다. 13대, 14대 대통령직인수위에서 일한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은 인수위가 풍기는 전반적인 인상은 “너무 저돌적”이라고 진단했다. 인수위가 고유한 업무 영역을 넘어 정부가 할 일이나 정책까지 손을 댄다면 월권이 될 수 있다(이종찬 전 국정원장· 15대 대통령직인수위원장)는 의견도 있다.

5년 전 대통령직인수위 정치개혁연구실장을 지낸 임혁백 고려대 교수는 현재 인수위의 정책 활동을 ‘한국판 ABC정책’라고 규정한다. 원래 ABC정책은 미국 민주당 클린턴 행정부가 하던 정책만 빼고(Anything But Clinton) 뭐든 검토한다는 공화당 부시 행정부의 외교 정책을 뜻한다. 임 교수는 “현정부의 교육, 외교, 통일 정책을 깡그리 무시하는 인수위 노선은 ‘Anything But 참여정부(ABC)’와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백성운 인수위 행정실장은 “아주 큰 변화를 가져오는 정책은 반대와 저항의 소리가 나오게 마련이고, 너무 성급하다는 비판도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영어교육정책과 정부조직개편 등 인수위의 핵심 정책은 새 정부가 가야 할 기본 방향이자 오랜 기간 준비해온 과제이므로 흔들림 없이 추진된다는 말이다.

▶인수위는 파격적인 영어교육 방안을 제시했다. 서울 염경중학교 영어캠프에서 원어민 교사와 수업하는 학생들.

인수위가 월권 내지 의욕과잉이라는 지적에는 “정책의 실행력을 보여주려고 너무 구체적인 수치나 방침을 밝혔을 뿐 인수위가 정책을 집행하겠다는 얘기는 아니다”고 해명했다.

인수위 내부를 들여다보면 난맥상도 없지 않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 따로, 잿밥에 마음이 가 있는 사람 따로라고 관계자들은 전했다. 아이디어가 넘쳐나는 이 당선인 본인은 물론, 인수위에 참여하는 상당수 학자와 공무원들은 말 그대로 일에 몰입하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의욕 과잉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열심이다. 하지만 일부는 새 정부에서 역할을 따내려고 한 건 주의에 매달리거나 과도한 충성심을 보이기도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게다가 학자들은 현장 사정에 어둡게 마련이다. 정책이 때로 국민 여론과 따로 노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또 인수위 내부에는 4월 총선에 출마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이들에게 인수위 일은 상대적으로 뒷전이다. 인수위의 한 관계자는 “인수위에서 일만 하는 사람은 바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고 말했다.

선거에 마음을 뺏긴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인수위 직원 중에서 4월 총선에 대비해 아예 지역구에 사무실을 내거나, 뻔질나게 표밭갈이에 나서는 사례가 서울과 지방을 막론하고 눈에 띈다.

영어몰입교육으로 여론이 돌아서 인수위가 궁지에 처했던 1월 말의 일이다. 국민 설득 과정도 없이 막무가내로 몰아붙여서는 안 된다는 신중론이 일부에서 제기됐다. 하지만 인수위 내부에서는 “이렇게 밀어붙이지 않으면 영영 못한다”는 의견과 함께 “어쨌든 이슈를 우리가 선점하지 않았느냐”는 반응도 돌출했다.

인수위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는 “인수위가 아직도 대통령 선거 때의 분위기, 즉 정치 게임 모드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한다는 인상이었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좀 심하게 말하자면 책임 있는 정부의 자세가 아니라 국정을 마치 선거 유세하듯 다룬다는 인상”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백성운 실장은 “이해득실을 따지자면 영어교육정책은 선거에서 감표요인”이라며 인수위 정책이 총선을 의식했다는 일각의 주장을 반박했다.

인수위의 튀는 행보에다 노무현 대통령의 정부조직법 거부권 행사 발언까지 겹쳤다. 노 대통령은 통일부 폐지 등을 골자로 한 정부조직법 개정안은 철학과 양심에 반하는 내용이라 서명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한나라당은 이를 ‘국민을 모독하는 발언’이라고 공격했고, 손학규 대통합민주신당 대표도 법안의 국회 심의에 앞서 거부권 행사를 언급하는 태도는 논의 흐름을 왜곡한다며 불만을 드러냈다.

정부조직법 거부권 발언을 놓고서는 여·야가 한편이 된 국회가 청와대와 대립하는 양상이다. 정부 이양기의 한국사회는 신·구 권력 간 격돌, 청와대와 입법부 간 대치가 어지럽게 맞물려 돌아간다.

뉴스위크 한국판은 국내 전문가 7인에게 인수위의 공과와 노 대통령 정부조직법 거부권 시사 발언을 어떻게 봐야 하느냐고 물었다. 이홍규 한국정보통신대 교수, 임성호 경희대 교수, 강원택 숭실대 교수는 지난해 말 동아시아연구원(원장 김병국)이 펴낸 ‘대통령직 인수의 성공 조건’의 저자들이다.

이종찬 전 국정원장과 임혁백 고려대 교수는 ‘대통령직 인수의 성공 조건’과 올 초 희망제작소가 만든 ‘인수위 67일이 정권 5년보다 크다’의 대담자로 참여했다.

김도종 명지대 교수는 한나라당 선대위 전략홍보기획조정회의 멤버였고, 김근식 경남대 교수는 참여정부의 지난해 남북정상회담 특별수행원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전문가들의 구술 또는 e-메일 답변을 정리했다.

박성현 기자 ps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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