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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으며생각하며>23.우리의 경수로지원은 민족주의서 비롯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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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미래가 어려운 것은 그 속에 모를 것이 너무 많이 들어있기 때문이다.이 많은 모를 것을 분류하면 대강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하나는 과학이고 하나는 운명이다.과학은 과학이라 개척하기어렵고,운명은 운명이라 모른다.운명이 황야와 비 슷하다면 과학은 도로와 비슷하다.하지만 과학이란 도로는 건설되어 있는 도로가 아니라 언제나 건설중인 도로다.
이달 들어 한국은 충남대덕에 출력 3만㎾짜리 연구용 원자로「하나로」와 전남 영광에 출력 1백만㎾짜리 발전용 경수 원자로「영광 3호」를 완공시켜 이미 각각 1백% 가동에 들어갔다.기이한 동시(同時)다.이 둘의 동시완성은 한국이 과학 을 건설함에있어 이룬 오래도록 기념될 이정표다.「하나로」의 완성은 한국의원자력 연구 능력이 이젠 박사학위를 따냈음을 의미한다.독자적으로 원자력 발전소를 설계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한 것은 「하나로」가 가져온 많은 수확 가운데 하 나다.
영광 3호기는 우리나라의 열번째 원자력 발전 시설이다.이로써원자력 발전용량은 8백60만㎾가 되었다.영광 3호기는 지금 건설중인 첫「한국표준형」원자로 울진3,4호기의 원형이다.출력 용량도 같다.영광 3호의 성공은 한국표준형 원자로 의 성공을 보증한다.이제 한국은 원자력 발전소 건설분야에서 설계.제작.시공.감리를 포함해 일단 현재의 세계 수준에 도달했다.북한에 공급하려는 원자력 발전소가 다름아닌 이 한국표준형 원자로다.
한국전력공사 원자력건설처장 전재풍(田載豊)씨를 찾아 가 만났다.백발이 오히려 따뜻해 보이는,얌전한 초로의 신사다.
『저는 충남 부여의 산골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좀 커서 논산으로 나와 학교를 다녔는데 논산만 해도 저처럼 바지저고리에 검정 고무신 신고 다니는 애는 별로 없었어요.도시 아이들이란 처음 이사온 산골 아이를 못살게 굴지요.그 녀석들 저 를 때리고꼬집고 했습니다.그럴때면 저는 반사적으로「아이라,아이라」하고 소리를 쳤습니다.「아야」라는 말대신에「아이라」라고 하는 것을 다른 고장 어디서도 그 후 들은 적이 없습니다.그 곳에서 저는「아이라」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이 부여 산골 소년은 그 뒤 한국의 큰 명문학교 가운데 하나인 대전고를 거쳐 서울대 공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한다.ROTC 2기생 장교로 軍복무를 끝내고 66년 그는 당시의 한국원자력원에 공무원이 되어 첫 직장을잡는다.그러다 2년 뒤인 68년에 원자력 발전 부문 업무가 한국전력공사로 이관되면서 그때의 공무원 월급으로는 장가도 못들고말것 같아서 그도 한전으로 직장을 옮겼다고 한다.전재풍씨의 말이 계속된다.
『맨처음 원자력 발전소 건설 말이 오가던때 생각한 출력 용량은 15만㎾였어요.69년에 기본계획을 세우면서 이것이 59만㎾로 확정되었습니다.이 기본계획대로 71년에 고리1호 건설계약이이루어졌는데 원자로는 미국 웨스팅하우스,발전기는 영국 GEC가맡았습니다.』 고리1호기가 준공된 것은 78년이다.그러니까 그해는「제3의 불」이라는 원자력의 시대가 한국에 처음으로 열린 해였다.전재풍씨가 한전에 입사해 근무한 이력과,한국의 원자력 발전소가 태동하여 성장해온 역사는 일치한다.그의 사무실이 서 울삼성동에 있는 20층짜리 한전 건물의 맨 꼭대기 층에 있다는것은 현재 원자력 발전소 건설 실무 책임자 지위까지 승진해 있는 부여 산골 어린이「아이라」전재풍씨의 성실한 인생을 잘 나타내고 있다.그의 말을 더 듣자.
『85년 영광 3,4호기 건설계획을 확정하면서 하나의 중요한논의가 일기 시작했습니다.그때까지 해오던 식으로 계속 나가다가는 원자력발전소 건설은 영영 기술자립도 안되고 국산화도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출력으로 말하면 고리 1 ,2호기.월성 1호기까지는 60만㎾급이었습니다.고리 3,4호기.울진 1,2호기.영광 1,2호기는 95만㎾급에서 99만㎾급이었습니다.각각 달랐습니다.노형(爐型)을 보더라도 고리 1,2,3,4호기와영광 1,2호기는 미국 웨스팅하우스社 의 가압경수로형,월성 1호기는 캐나다 원자력공사의 가압중수로형,울진1,2호기는 프랑스프라마톰社의 가압경수로형,이렇게 제작회사에 따라 설계가 달랐습니다.그래서 영광 3,4호기 입찰조건에는 한국측에 기술을 전수하는 조건을 중요한 입찰 조건으로 제시했습니다.
이 조건에 따라 87년에 실시한 영광 3,4호기 입찰은 미국의 컴버스천 엔지니어링社(ABB-CE)에 낙찰되었습니다.한국표준형 원자로는 사실상 영광 3,4호기를 모델로 삼아 개발했습니다.지금 첫 한국표준형 원자로로서 건설중인 울진 3,4호기는 내용의 97%가 영광 3,4호기와 같다고 보면 됩니다.』 한국표준형 원자로건설에 관련된 기술면허는 현재 모두 한국회사들이 소유하고 있다.원자력 계통설비의 설계기술은 한국원자력연구소,원자력 계통설비와 발전설비의 제작기술은 한국중공업,종합설계기술은한국전력기술주식회사,종합관리기술은 한국전력 공사,원전(原電)연료기술은 한국원전연료주식회사,시공기술은 국내 주요 건설회사들이그 면허를 갖고 있다.
이 회사들은 울진 3,4호기에 앞서 이번에 완공된 영광 3호기,얼마 안있어 완공될 영광 4호기를 두고 이미 동일한 역할분담.동일한 조직을 가지고 시작부터 완공까지 맡아서 해냈다.
전재풍씨는 한국에서 60년대까지 미개척 상태로 있던 원자력 발전(發電)과학을 배우고 개척해 기술 자립을 실현시킨 프런티어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그가 가난한 산골에서 태어나 자신의 노력과 재능만으로 오늘날의 그를 만든 것같이 그의 동료들도 대부분 이와 비슷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이들은 자기들이 어렵사리 건설해 온 이 과학을 지금부터 북한 경수로를 짓는데 이바지하고싶어한다.
이것은 그 가장 값지고 순수함 때문에 아마도 북한 당국자도 거절할 수 없는 민족주의일 것이다.남한 국민이 자기들이 번 아까운 돈을 세금으로 내놓고 북한 경수로 프로젝트를 지원하려 하고 있는 것도 그것이 지금은 외국의 기술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기술이기 때문일 것이다.전재풍씨가 안타까워하면서 말한다.
『북한과 미국 사이의 제네바 협정에 따르면 북한 경수로 발전소 건설은 2003년까지 완공하기로 돼 있습니다.그렇다면 지금예비조사를 실시하고 있어야만 합니다.일을 하려면 실제가 중요합니다.다른 논의거리가 있다면 그것은 예비조사를 실 시하는 한편으로 하면 됩니다.』 전재풍씨의 이 말은 또 한 사람 한국표준형 원자로를 북한에 건설하는 것을 성사시키 려고 애를 쓰고 있는 최동진(崔東鎭)씨의 증언과 부합한다.나는 경수로사업지원기획단 단장인 그를 만나러 서울 삼청동 그의 사무실을 찾았다.마침봄가랑 비마저 내리는 산자락에 싸여 그의 사무실은 은사(隱士)처럼 숨어 있다.올해 갓 환갑을 지난 최동진씨는 경기도 시흥 바닷가 월곶 출신이다.인천고와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한 다음 줄곧 외교관 생활을 해왔다.스웨덴 대사직과 외무부 차관보 자리도지냈다.매력적인 중저음 목소리에 헌칠한 키의 이 미남 신사는 말한다. 『우리 경수로 기획단은 북한과 미국 사이에 제네바 협정이 작년말 타결된 다음 올해 1월23일 현판식을 가졌습니다.
우리가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지난 3월6일에 뉴욕에서 발족한「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와의 업무연계입니다.북한은 한국표준형을 들여 놓으면 혹시 그것이 남한측의 트로이의 목마(木馬)노릇을 하지나 않을까 하고 의심하고 있다고 보는 추측도 있습니다마는 제 생각으로 정말 그렇다면 이건 북한의 기우(杞憂)라고 봅니다.
KEDO의 설립 목적은 한국표준형 경수로를 북한에 제공하기 위한 것이라고 명시돼 있습니다.그러나 한편 KEDO는 국제법에따른 정부간 국제기구입니다.어떤 단일 국가의 정부가 트로이의 목마를 보내는 음모를 혹 꾸미더라도 그건 불가능 하게 되지요.
KEDO를 설립한 이유는 바로 만의 하나 이러한 정치적 동기가끼어들지도 모른다고 의심받는 것을 사전에 배제하자는데도 있습니다. 또 KEDO는 북한을 대신해 경수로를 발주하고 이것을 북한에 공급하는 주체가 됩니다.당연히 자신이 공급하는 경수로의 성능을 KEDO는 북한 당국에 1백% 보장합니다.이 기구는 일단 韓.美.日 세 나라가 서명함으로써 설립되었습니다만 어떤 나라라도 가입 수락 의향서만 내면 제한없이 참여할 수 있습니다.
』 ***以核治核의 처방 최동진씨의 별명은 「멋쟁이」다.그의 개인적인 소원은 아무쪼록 북한이 한국표준형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작년말 北-美 사이의 제네바 협정은 열은 열로써 치료한다는동양적 의술을 채택해 타결을 보았다.북한의 핵무기위협을 핵발전소 제공으로 치료하겠다는「이핵치핵(以核治核)」의 처방이라고 할까.그러나 남한 국민들에게 북한 정권은 지금도 동 족이자 원수고 원수이자 동족이라는 확연히 모순되는 존재다.
이 모순을 해결하려고 남한 사람들은 과학과 돈을 내놓겠다는 것이다.돈만 낚아채가고 물건은 미국 것을 사겠다는 음모를 북한이 미국 회사들하고 꾸민다면,그런데 드는 돈을 못내놓겠다고 한다고 해서 최동진씨와 전재풍씨가 쏟는 정성으로 대 표되는 남한인민의 마음을 북한 당국은 나무랄 수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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