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비서실>220.YS의 승부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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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김영삼(金泳三)민주당총재의 밀사 황병태(黃秉泰)의원이 여권의밀사 박철언(朴哲彦)청와대정책보좌관을 만난 89년 3월은 金총재가 「여당으로의 변신」이라는 대도박을 구상하기 시작한 시점이라고 볼수 있다.이 무렵은 또 DJ가 박철언보좌 관이라는 채널을 통해 노태우(盧泰愚)대통령의 중간평가 연기선언에 동조함으로써 YS를 따돌린 시점이기도하다.
黃의원이 YS의 밀명을 받고 홍성철(洪性澈)비서실장과 정국전반에 대한 밀실대화를 나누기 위해 타워호텔에 도착했을 때 박철언보좌관이 나와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黃의원은 『洪실장과 만나기로 한 자리였는데 朴보좌관이 나와 있어 놀랐 다』고 하지만 朴보좌관은 이미 YS와 상당한 교감을 나눈 상태에서 YS로부터 『黃의원을 정계개편대화의 채널로 삼아라』는 점지를 받고 나갔던 것이다.이후부터 洪실장은 빠지고 黃-朴채널이 본격 가동됐다. 박철언前의원은 『이미 88년부터 계속 YS와 만나면서 여러가지 정국현안에 대한 대화를 나누던중 89년 봄 무렵에는 얘기가 상당히 진전됐죠.그래서 YS에게 「주위의 이목도 있고 해 자주 만나뵙기 힘듭니다.총재님을 대신할 대리인이 있 으면 얘기하기가 훨씬 쉽겠는데,누구 한사람 정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더니 「황병태의원과 얘기하라」고 지정해 주더군요.마침 黃의원은소련방문 문제로 洪비서실장과 접촉하던중이라 자연스럽게 두사람이만나는 자리에 합석했죠』라고 기억했다.
당시 YS와 朴보좌관의 사이는 무척 좋았다고 한다.독대할 경우 방에 들어서면 YS는 직접 朴보좌관의 외투를 받아 걸어주는가 하면 상석에 앉기를 권한다.물론 상석은 YS차지지만 YS는곧장 『설탕과 프림을 어떻게 넣느냐』며 직접 커 피를 타서 건네고는 손을 꼭 잡으면서 『도와주시오』라는 말로 얘기를 시작했다고 한다.朴보좌관이야 「정계개편을 위해 좋은 관계를 유지해 둬야한다」는 차원에서 접근했고,YS 역시 여권핵심과의 채널은 필요했기에 얘기는 잘 풀려나갔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朴보좌관은 黃의원과 만나자마자 『정치가 계속 이런 상태로 나아가서는 곤란하지 않겠습니까.이러다가는 나라고 뭐고간에 다 공멸합니다.YS도 마찬가지가 됩니다.정치를 살리고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는 정계개편을 해야합니다 』고 주장했다.朴보좌관의 주장은 정당간의 연합,연립정부와 같은 내용이었다.黃의원은 즉답을 유보한채 곧바로 YS에게 지침을 요청했다.
이때 YS는 처음으로 정계개편에 적극적인 반응,정당연합보다 한발 더 나아간 「합당」을 지침으로 내렸다.YS는 黃의원에게 『정당연합은 안됩니다.한다면 합당을 해야지요』라며 4.19직후민주당 신.구파 연립내각의 실패사례를 들어 설명 했다.민주당정권이 만들어진뒤 신.구파에서 각료를 따로 추천해 연정을 시도했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실패하고 만 것을 지켜본 경험담이었다.
결국 우리 현실에서 연정은 맞지않으며,더욱이 민주당과 민정당은뿌리가 다르기 때문에 정당연합을 하 면 금방 깨진다는 주장이었다. YS는 당시의 심경에 대해 3당 통합후 기자회견등에서 『나는 고독한 선택을 많이 한 사람이다.나는 일단 결심하고 나면뒤돌아 보지않고 앞으로만 가는 사람인데 3당 통합때만은 그렇지않았다.아침에 결심했다가도 저녁에 마음이 돌아서고 ,자고 일어나면 마음이 바뀌었다』고 기억했다.
이때 YS의 결심을 재촉한 사람이 밀사겸 책사 황병태다.YS가 黃의원의 정계진출욕구를 간파하고 국회의원자리를 보장하며 黃의원을 설득했듯이,黃의원은 YS의 결심을 촉구하기 위해 YS의유일무이한 희망인 대권장악 가능성을 거론했다고 한다.
黃의원의 지론은 간단히 말해 「양金(김영삼.김대중)분할상황은집권세력의 입장에서 꽃놀이패」라는 비유로 요약된다.바둑에서 별부담없이 상대방을 골려줄수 있는 꽃놀이패처럼 집권세력은 양金씨의 대권경쟁심리를 이용해 얼마든지 두사람을 골 릴 수 있다는 얘기다.다시말해 양金씨가 같은 야당후보로 대권에 도전해 표를 나눠가지면 항상 집권여당후보가 이긴다는 논리다.87년의 쓰라린경험으로 YS 가슴깊이 파여있는 상처를 들쑤시는 얘기였다.
대안은 두가지,즉 여당으로의 변신과 야당후보 단일화다.그러나후자는 이미 87년 실패한 경험이 있다.YS입장에서 후보 단일화의 실패는 DJ의 약속위반이었다.결론은 자명하다.대권을 잡기위해 남은 대안은 여당으로의 변신밖에 없었다.黃 의원은 이같은주장을 『호랑이한테 잡아먹히지 않을 자신만 있으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는다』는 말로 비유했다고 한다.
또다른 쓰라린 지적은『4당 체제로 가면 매번 당하고 있어야 한다』는「중간평가유보」의 교훈이었다.盧대통령과 DJ가 손잡고 중간평가를 유보한데 대한 YS의 소외감을 겨냥한 지적이었다.
YS의 오랜 가신(家臣)중에도 그의 합당결심을 재촉하는 주장은 있었다.가신그룹의 비둘기파인 김동영(金東英)의원,「左동영」이었다.그런데 그에게 합당을 제안한 인물은 엉뚱하게도 정호용(鄭鎬溶)의원이었다.지금은 고인이 된 金의원은 합당 직후 한 측근에게 『정호용의원이 정계개편을 제안해 김영삼총재에게 보고했었다.당시 정호용의원이 주장하는 정계개편의 핵심은 「反DJ 연합」이었다』고 회고했었다.
당시 鄭의원은 광주사태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한다는 야권,특히 평민당의 집요한 공세로 정치적 위기에 처해있었다.鄭의원의「反DJ연합」주장은 일종의 자구책이기도 했다.
어쨌든 金의원과 정호용의원간의 대화는 黃-朴채널처럼 지속되지않았다고 한다.그러나 YS가 가장 믿는 가신 김동영의원은 이후줄곧 합당을 주장했으며,합당선언후 실무협상과정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상도동 캠프의 상당수가 합당을 추 진한 밀사 황병태의원을 『YS를 팔아먹는다』고 비난할 당시에도 金의원은 黃의원을 엄호했다.金의원은 심지어 3당 통합직후 내각제문제로 민정계와 심각한 갈등을 빚을 당시 상도동 캠프의 대다수가「내각제 비토.탈당불사」를 주장함에도 불구하 고 혼자 『내각제 수용이 불가피한 상황』이라고 주장했다가 YS로부터 혼이 났을 정도로 합당성사에 적극적이었다.
그렇게 조심스런 타진이 오가던중 터진 사건이 동해보궐선거 후보매수사건이었다.벼랑끝에 선 YS 발밑의 흙더미가 무너져내리는순간,YS는 직접 노태우대통령에게 반전의 독대카드를 던졌다.
YS는 5월25일 확대당직자회의석상에서 『소련방문은 초당외교차원인만큼 노태우대통령과 협의하는게 바람직하다』며 盧대통령과의독대를 요청했다.투쟁을 부르짖어온 YS로서는 분명한 후퇴였다.
6共 청와대관계자 E씨는 『당시 DJ보다 YS가 더 다루기 힘들었습니다.공안바람이 불어도 YS는 악착같이 버티는거예요.DJ는 결국 당국의 수사에 응했지만 YS는 끝내 불응한 것만 봐도알 수 있죠.그런데 상당히 뻣뻣하던 YS도 동해보궐선거사건이 터진 4월말부터는 달라지기 시작하 더군요.주로 김동영.황병태의원 두사람이 여권쪽을 노크했죠』라고 기억했다.
YS가 盧대통령과 독대한 5월31일은 독대요청 6일후이자 구속됐던 서석재(徐錫宰)사무총장이 보석으로 풀려난 다음날이며,소련방문 하루전이었다.
YS는 회고록 『나의 정치비망록』에서 『이날 회담에서 盧대통령은 당시 6共 정치현안과 목표에 대한 나의 의중을 타진했다』고 기억했다.현안과 목표란 「중간평가」와 「내각제」였다.중간평가는 일단 유보선언됐지만 아직 취소된 상황은 아■ 었다.YS는중간평가에 대해 『국민과의 약속사항인만큼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사실 중간평가는 법률적 구속력을 가진 사안은 아니지만 국민과의 약속인만큼 지키지말라고 할 수는 없었다』고 회고했다.내각제에 대해서는 『선거를 치른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지금은 그런문제를 얘기할 시기가 아니다고 대답했다.내각제문제는 야당과 국민이 동의한다면 몰라도 단순히 정파들만의 이해관계로 국가권력구조를 바꿀 수는 없다는 차원에서 유보적 입장을 피력했다』고 기억했다.YS는 그러면서도 『중간평가문제나 개헌문제는 국가이익과정치발전 차원에서 여야간 협상의 대상이지 투쟁의 대상은 아니라는 것이 나의 견해였다』고 덧붙였다.「정권퇴진」운운하던 얼마전의 YS와는 판이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두사람은 소련방문후를기약하고 헤어졌다.
소련방문은 YS의 합당결심을 확고부동하게 만든 계기였다.민주당 관계자 X씨는 『YS는 소련방문기간중 두가지 점에서 합당결심을 굳혔다고 봐야합니다』고 말했다.
첫번째는 소련방문을 전후해 6共 정부의 극진한 배려를 받으면서 YS는 내심 「노태우대통령이 DJ를 버리고 나를 선택했구나」라고 확신했다는 것이다.당시 DJ도 소련방문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정부쪽에서 YS쪽을 밀어준 것이다.YS를 가 장 초조하게했던 盧-DJ간의 밀약이 「중간평가유보라는 단발성으로 끝났다」는 확신이었다.이는 거꾸로 자신이 선택되었다는 안도감이기도 했다. ***소련방문의 감동 둘째는 사회주의체제의 붕괴를 보면서황병태의원이 주장해온 세계사의 대전환,투쟁시대의 종언을 절감했다는 점이다.YS는 자신을 초청해준 프리마코프 세계경제및 국제관계연구소(IMEMO)소장과의 면담에서 『왜 한국사람들은 한강의 기적을 이룬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을 존경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고 무척 당황했었다고 한다.동행했던 X씨는 『강대국이라는 소련이 경제에 실패해 망해가는 모습을 본데다가 최고회의의장(프리마코프는 YS의 소련방문기간중 IMEMO소장에서 입법부 수장인 최고회의의장이 되었다)이라는 사람까지 한국의 경제성장을극찬하고 부러워하는 것을 보고 YS도 느끼는 바가 많았을 것입니다』라며 「한강의 기적」세력에 대한 YS의 재평가,긍정적인 방향으로의 인식전환을 시사했다.
YS도 회고록에서 『합당을 결심하면서 소련을 방문해 보고 느낀 감동도 생각했다.…시대도,정치상황도 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마침 盧대통령도 여.야당이 다시 태어나는 개편을 하자고 했다.민주화의지를 함께 할 수 있다면 힘을 보태는 것 이 보다 나은 선택이라 생각했다』며 「소련방문의 감동」이 합당결심을 재촉한 원인의 하나임을 밝혔다.
소련방문을 마치고 귀국한 이틀뒤인 6월21일 YS는 이미 예정돼 있던 청와대회담에서 곧바로 「합당」카드를 던졌다.
〈吳炳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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