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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도마복음이야기] 기독교는 원래 서양 종교가 아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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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몬산으로 올라가는 골란고원 길목에서 마이달 샴스(Majdal Shams)라는 작은 마을을 지나게 된다. 원래 시리아 땅이었는데 1967년 6일전쟁 이후 이스라엘의 점령지가 되었다. 드루즈(Druze)족이 사는 곳인데, 시장통 그들의 특별한 의상이 눈에 띈다. 메시아는 남자 가랑이에서 태어난다고 믿기 때문에 애가 풍 빠질 것을 염려하여 가랑이 밑에 포대가 형성되는 큰 바지를 입고 발목은 단단히 묶는다. 일설에 이들은 모세가 시내 광야에서 만난 현명한 장인 미디안 족장 이드로의 후예라고 한다. 이들은 불교·기독교·유대교·그리스철학이 융합된 이슬람을 신봉하는데 유일신과 7명의 선지자를 믿는다. [임진권 기자]

기독교를 생각할 때 검토되지 않은 우리의 일반관념 중에서 가장 거대한 오류가 기독교를 그냥 맹목적으로 서양 종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양코배기 서양 사람들에 의하여 만들어졌으며 그들에 의하여 팽창되었으며 그들에 의하여 최근에 동방에 전도되었다고 믿는 것이다. 아직도 우리나라 거개의 기독교인은 예수는 서양 사람이며 기독교신학은 서양 사람들이 만든 교리체계이며 따라서 기독교에 관한 한 서양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하여 말하는 모든 것이 정통이고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관념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이들이 생각하는 ‘서양(the West)’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이들은 우선 이탈리아나 프랑스·스페인·영국·독일 등등을 떠올릴 것이다. 역사적으로 말하면 라틴 웨스트(Latin West), 즉 서유럽 문화권을 두루뭉실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단언컨대 초기 기독교운동은 라틴 웨스트와 전혀 관련이 없다.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함으로써 로마 중심의 가톨릭 정통성을 확립한 이후의 기독교를 가지고 기독교를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수는 팔레스타인 사람이며, 예루살렘에 특별한 예속감을 지니지 않았던 갈릴리 지역의 사상가요 운동가였다. 내가 1972년 대만대학에 유학 갔을 때 철학과 대학원 석사과정 학생으로 입학한 동기생 중 아주 특이한 인물이 있었다. 이름은 요아브 아리엘(Yoav Ariel)! 그는 히브리 바이블과 탈무드, 카발라 미스티시즘(Kabbala mysticism)에 정통한 학자였는데 텔아비브대학 철학과에서 그를 중국철학 전공 교수로 키우기 위해 대만대학으로 파견했던 것이다. 그는 중국말이나 한문을 아직 습득하지 못했기에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나와 단짝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정직·충성·효·박애·희생, 그리고 유일신이 드루즈 삶의 원칙이다. 첩 제도, 담배, 술, 돼지고기, 드루즈족 외혼을 금한다. 이들은 매우 점잖고 개방적이며 친절했다. 시리아 문명의 깊이를 전해준다.

나의 대만대학 유학 생활이란 아이러니컬하게도 중국철학을 공독하는 본업보다 이 유대인 이방인에게 중국철학을 가르쳐주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그것은 심오한 사상투쟁의 과정이었다. 그가 유대교 전통에 관하여 가지고 있는 모든 관념과 중국철학적 가치를 편견 없이 습득한다고 하는 노력 사이에는 태양열보다 더 뜨거운 마찰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와 나는 만나기만 하면 싸웠다. 유대인은 성격이 한국인처럼 직선적이고 활달하고 다혈질이다. 그리고 말 습관이 에두를 줄을 모른다. 우리들의 충돌은 가관이었다. 그러나 우리 둘 사이에 존속했던 첨예한 사상대결의 이면에는 진리를 향한 청춘의 열망이 불타고 있었다. 우리는 위대한 우정을 나누었다. 기실 오늘날 내가 이렇게 도마복음서 주해를 집필하게 된 이면에는 이러한 20대의 치열한 사상역정이 뚜렷한 여로를 그리고 있다. 그런데 내가 이 친구를 처음 만났을 때 들은 놀라운 이야기가 있다. 난 그를 서양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왜 서양인인 당신이 중국철학을 공부하겠다고 대만까지 와 날 괴롭히느냐고 반문했을 때 그는 매우 명쾌하게 답변했다.

“I am an Asian.(나는 아시아사람이오.)”

예수는 아시아 사람이다. 아시아대륙의 서단 갈릴리에서 태어나고 활동한 사람이다. 그리고 베드로가 활약한 지역도 코엘레 시리아(Coele Syria·현 레바논의 알 비카[al Biqa]지역)이고, 바울이 초대 교회를 개척한 곳도 소아시아 지역이다. 그리고 기독교가 국가종교로서 최초의 공인을 얻은 곳도 서구의 어느 곳이 아닌 동방의 나라 에데사(Edessa)였다.

우리에게 친숙한 고전,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의 『동방견문록』에 바로 도마복음서의 저자이자 예수의 쌍둥이 형제로 알려진 도마의 최후를 전하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는 17년간의 중국 체류를 끝내고 베네치아로 돌아오는 길에 남인도 서해안 말라바르 지방(the Malabar Coast)의 한 작은 마을에서 성 도마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것을 목격한다. 그리고 그 지역에 내려오는 도마의 이적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리고 도마가 어떻게 죽었는지 듣게 된다. 폴로는 말한다: “기적에 관해서는 이상으로 충분히 말하였으므로 다음에는 성 도마가 살해된 광경을 그곳 사람들로부터 전승되어 온 대로 이야기할까 한다.”

도마는 어느 날 숲 속에 있는 암자에서 밖으로 나와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 지방은 공작새가 많이 사는 곳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했다. 그때도 도마 주변으로 공작새가 떼 지어 날아다니고 있었다. 도마가 열중하여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가비족의 사냥꾼이 도마 주변으로 떼 지어 날고 있는 공작을 잡으려고 화살을 당겼다.

가비족 사람은 그곳에서 도마가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화살이 공작에 맞
았다고 생각했지만, 실상 그 화살은 도마의 오른쪽 겨드랑이를 관통했다. 화살을 맞고도 도마는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그는 그런 가운데 평온히 잠들었다.

전해 오는 바에 따르면 도마는 오순절 사건 이후 사도들이 세계 각지로 책임선교를 맡아 떠나는데, 인도로 배정되었다고 한다. 가는 길이 너무도 험난하여 병약을 구실로 이를 피하려 하자, 예수가 꿈에 나타나 “도마야! 두려워 말라. 나의 축복이 너를 지켜줄 것이다. 너는 인도에 가 복음을 전해야 한다” 하고 도마를 고무했다. 때마침 인도 서북부 아라코시아(Arachosia)와 인더스강 상류 지역을 통치하고 있던 곤다포루스(Gondaphorus)왕이 건축공을 물색하기 위하여 파견한 상인 압바네스(Abbanes)를 예루살렘에서 만난다. 도마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들여 상인 압바네스와 함께 인도로 가 왕의 부탁으로 궁전을 짓기로 한다. 그러나 도마는 받은 건축비로 궁전을 짓지 않고 불쌍한 과부와 고아를 구제하는 일에 다 써 버린다. 왕이 대로 운운.

『이방민족지』에 따르면 도마는 예수 승천 2년 후에 전도 사명을 띠고 인도로 가던 중 에데사와 파르티아(Parthia), 부카라(Bukhara), 박트리아(Bactria)에 들러 기독교를 전했다. 도마가 인도에 온 것은 AD 52년이며 그가 죽은 것은 AD 72년으로 사료되고 있다. 그러니까 도마가 에데사에서 기독교를 전파한 것은 AD 52년 이전의 사건이 된다. 에데사는 헬라 문명권과 교류가 있었지만 시리아 문화권의 센터였으며 시리아어 문학의 전통을 유지했다.

에데사에 첫 동방교회가 건립되고 타티안(Tatian, 110~180), 바르데산(Bardesane, 154~222), 바루트(Barut) 등 탁월한 기독교 학자들이 나타나 초기 기독교 교리와 복음을 정리했다. 아브가르왕이 박해받고 있는 예수에게 안식처를 제공해 주겠다고 한 약속은 결국 훗날 신앙적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에데사로 모여들어 기독교를 동방으로, 전 세계로 전하게 되는 구심점이 된 것이다.

에데사의 타티안이 바로 최초의 4복음서 체제인 『디아테사론』(Diatessaron)의 편집자다. 바르데산은 타티안의 시리아어로 된 『디아테사론』을 후세에 전했다. 그리고 AD 144년, 구약의 하나님과 단절을 선언하고 구약의 전면적 폐기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로마교회에서 파문당한 마르시온(Marcion, ?~160)의 신봉자들이 세운 마르시온교회(Marcionism)의 활동무대가 바로 에데사였다. 그리고 에데사는 마니교(Manichaeism)의 주요한 활동지였다.

바울이 기독교를 소아시아와 희랍 지역에 전파하였다는 이야기는 신빙성 있게 들리지만, 동시대에 도마가 기독교를 에데사와 인도에 전파하였다는 이야기를 하나의 전설로 취급해 버리는 우리의 사고방식의 저변에는 자료 빈곤 이외에도 기독교는 서방 종교라는 선입견이 짙게 깔려 있다. 이제 우리는 기독교의 역사와 말씀 전승에 새롭게 아시아적 사유를 복원시켜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아시아 대륙문화의 유기적 일부로 재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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