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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두우시시각각

손학규와 이회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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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와 손학규 대통합민주신당 대표의 심정도 이들 못잖다. 아니 오히려 더 힘겨울 수도 있다. 이 총재는 두 번이나 대통령 문턱에서 좌절했다. 그런데 한나라당 총재 시절 서울시장 후보로 공천해 주었던 이명박 후보는 자신보다 도덕적 결함이 훨씬 많아 보이는 데도 수월하게 당선됐다. 하늘의 불공평함이 원망스러울지 모른다.

손 대표가 한나라당에 남아서 후보 경선에 참여했더라면 어땠을까. 자신이 후보가 되기는 어려웠겠지만 경선 막바지에는 이명박·박근혜 양측의 열렬한 러브콜을 받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지금쯤은 확고한 지분을 가진 2인자가 됐을 것이다. 대통령의 권한을 상당 부분 넘겨받은 ‘책임총리’나 집권당의 대표도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탈당을 선택했고, 범여권의 대선 후보 경선에 참여했지만 실패했다. 그야말로 ‘쪽박 찬 신세’가 됐다.

역사에 가정(假定)은 없다고 한다. 정치는 더욱 그렇다. 한 번의 잘못된 선택으로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게 정치 지도자의 숙명이다. 이회창과 손학규가 과거로 돌아가서 다시 선택할 기회를 가질 방법은 이미 없다. 이제는 지금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길만 남아 있을 뿐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한나라당을 떠난 뒤 현저히 달라졌다는 점이다. 두 사람 모두 경기고와 서울대를 졸업했고, 경력 또한 화려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세태에 순응해 자신의 안일만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성실하게 살았고 각자의 분야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국민의 눈에 그들은 ‘귀족’ ‘엘리트’로 비쳤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그 한계를 넘어서고 있는 듯하다.

이제 비로소 그들이 정치인답게 보인다. 한나라당에 있을 때에는 보여주지 못했던 정치력도 선보였다. 점퍼를 입은 이회창의 모습이 어색하지 않다. 장애인이나 상인과 대화를 주고받는 장면이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간다. 달걀 테러를 당한 뒤 “계란 마사지 한 셈 치자”라며 넘어갈 줄도 안다. 대선 후 내부에서 분열상이 나타나자 그는 즉각 ‘측근들의 2선 후퇴’와 본인의 불출마 카드까지 던지면서 수습에 성공했다. 답답하리만치 ‘모범생’ 모습을 보이던 손학규도 달라졌다. 한나라당 출신이란 한계를 딛고 신당의 대표가 됐다. 그것이 독배(毒杯)일지도 모르지만 쉽지 않은 일임에는 틀림없다. 대표가 되자마자 ‘제3의 길’을 내세우면서 진보좌파 진영의 변화를 주문하고, “무난한 공천은 무난한 죽음”이라며 공천 혁신을 외치고, “가장 중요한 기반인 호남에서 신당이 새 모습을 보여야 한다”며 호남의 물갈이를 밀어붙이고 있다.

고난은 사람을 성숙하게 한다. 그들이 진정으로 변신했다면 밑바닥까지 떨어진 데에서 생겨난 절실함 때문일 것이다. 대선 후 암담했던 그들에게 조금씩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명박 정권에 대한 견제심리가 슬슬 살아나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으니 말이다. 한국 국민들은 ‘가진 자의 오만’에 대해서는 지극히 냉담하다는 것도 이회창과 손학규에겐 희망이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았다. 탈당한 ‘원죄’는 정치생활을 하는 한 계속 그들을 따라다니며 괴롭힐 것이다. 총선에서 지역의 아성에 안주할 경우 그들이 내세우던 원조보수와 중도진보란 이념성은 명분을 얻을 수 없다. 이런 한계를 넘어서야 그들이 비로소 야당 지도자로 거듭났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김두우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