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감성과 명분을 넘어 국익 외교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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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그런데 사람의 일이 항상 그렇듯 감성이나 명분이 지나치게 개입되면 올바른 판단을 그르치기 쉽다. 어떤 외교적 현안에 감성적으로 당장 속시원한 대응은 대개의 경우 뒷감당이 어렵다. 지나친 명분론도 마찬가지다. 국내 정치에서 개인은 도덕과 정의를 외치다 의사(義士)·열사(烈士)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제 정치의 험한 판에서 의사 국가, 열사 국가가 되어 나라의 목숨을 바쳤다면 그것은 조롱의 대상이 될 뿐이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이익을 고려한 냉철한 전략 판단이다. 이것이 잘못되면 그 불행의 여파는 당대뿐만 아니라 몇 대를 간다. 특히 대국들에 둘러싸인 소국의 경우는 나라의 존망 자체가 위협받고, 그래서 살얼음 위를 걷는 심정으로 임해야 한다.

명이 청으로 바뀌는 세력판도의 변화 시점에서 무엇이 백성을 위해 유익한 것이냐를 계산해 외교를 했던 왕이 광해군이었다. 그런데 반정을 일으켜 집권한 인조는 광해군의 외교를 의리를 모르는 야만 외교라고 비판하며 숭명(崇明)의 명분에 집착했다. 결국 정묘·병자 호란의 치욕을 당했고 애꿎은 백성은 엄청난 고통을 치러야 했다.

그런가 하면 17세기 초반 같은 시대 프랑스의 재상 리슐리외(Richelieu)는 아직도 종교라는 명분이 사람들의 생각을 깊이 지배하던 시기에 철저한 국익을 추구해 프랑스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가톨릭 사제 출신인 그는 가톨릭 정치세력의 본산인 합스부르크 왕가가 중부 유럽을 통일하려 할 때 전쟁까지 하면서 300여 개로 분단된 개신교 국가 독일을 도왔다. 그 결과 프랑스는 2세기 동안 분단된 약한 독일을 이웃으로 둔 채, 유럽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요즈음처럼 경제로 서로 얽힌 세계화의 시대에도 이 같은 국제 권력의 게임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아이디어의 힘을 강조하는 부드러운 권력(soft power) 이야기도 경청할 만하겠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물리적 힘의 권력(hard power) 게임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는 더 시급한 문제다.

예를 들어 미국은 동아시아가 어느 특정 국가의 영향력 아래 들어가는 것을 막고자 하는데, 중국은 동아시아를 자국의 영향권 안에 넣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도 양국은 실리적 국익 계산에 따라 서로 협조하고 있다. 일본은 상승하는 중국의 영향력을 불안해 하면서 미국과 동맹을 강화하고 있고, 러시아는 중국과 협력해 미국의 패권을 약화시키고자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5년 미국의 군사비는 세계 군사비의 40%로, 중국의 7배였고 2위에서 15위 국가까지의 군사비를 합친 것보다 많았다.

이러한 게임이 진행되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달성할 것인가. 어떤 전략적 선택을 해야 최대의 국가이익을 거둘 수 있을 것인가. 이제 우리도 이런 문제들을 놓고 차분하고 알맹이 있는 논의가 가능한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한편으로는 세계 경제력 12위를 자랑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고래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라는 피해의식에 빠져 감성적으로 대응하거나, 명분과 이념에 치우친 외교적 선택이 복잡한 게임 속에서 무슨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른 채 표류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다. 차가운 계산과 냉철한 논리는 없고, 자주냐 친미냐, 민족이냐 국제냐 같은 공허한 명분론에 매몰돼 나라 전체가 흔들리는 일도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다. 정말로 세계 경제력 12위 국가라고 한다면, 일본에 먹히고 나서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하거나 우루과이 라운드 체결 후 혈서 쓰고 삭발하던 방식은 이제 접을 때가 되지 않았나.

경제 발전이라는 국가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과거의 한을 묻어버리고 미국이나 한국과 관계를 강화하려 노력하는 베트남 사람들이 돋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윤영관 서울대 국제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