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가프리즘] 모자이크가 더 이상 면죄부일 수 없는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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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케이블 채널은 모자이크 천국이다. 그렇다고 신체 주요 부위나 상표를 가리는 과거 식 모자이크가 아니다. 출연진이나 취재 대상의 얼굴을 가리는 모자이크 처리가 전례 없이 늘었다.

두 가지 유형의 프로그램에서 이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우선 일정한 시청률을 확보해준다는 이유로 급격히 증가한 연예 관련 프로그램이다. etN같은 연예오락 전문 채널이 생겼는가 하면, tvN을 비롯한 각 케이블 채널이 연예 전문 뉴스들을 신설했다. 이 프로그램들은 발 빠르게 연예가 소식을 전한다는 미명 하에 모자이크와 이니셜 보도를 남발하고 있다. 역시 케이블 채널들을 통해 방송되고 있는 미국의 연예 프로그램들과는 대조적이다. 이들 프로그램에서 모자이크와 음성 변조가 등장하는 경우란 거의 없다.

케이블 채널들이 요즘 부쩍 제작에 열을 올리고 있는 리얼리티나 준 리얼리티, 그리고 재연 프로그램도 모자이크 투성이다. ‘독고영재의 현장르포 스캔들’, '리얼스토리 묘‘, '김구라의 위자료청구소송’(이상 tvN), ‘박철쇼’, '이 사람을 고발합니다‘(이상 스토리온) 등이 좋은 예이다. 물론 이런 프로그램들이 모자이크를 쓸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 우리 경우는 미국과 달리 얼굴을 내놓고 인터뷰를 하려는 문화가 정착돼 있지 않다. 취재원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할 경우 모자이크를 쓰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렇다고 연예·방송 환경 탓으로만 돌릴 일도 아니다. 프로그램 제작 편의상 모자이크를 남발하는 경우도 많아서다. 연예 전문 프로그램의 경우 내용상 꼭 필요하지도 않은 일반인이나 정체 불명의 관계자 인터뷰가 적잖게 등장한다. 이런 경우는 누군가 인터뷰는 해야겠는데 취재가 쉽지 않은 마당에, 억지 춘향 격으로 한 인터뷰라는 혐의가 짙다.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하고 음성까지 변조한 마당에 그냥 프로그램 주변 인물들을 인터뷰한다고 해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모자이크 처리는 오히려 시청자의 관심을 불러 모으는 효과도 있다. 케이블 채널은 이 점을 노린다. 과거 외설 영화들이 신체 일부를 모자이크 처리해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한 예가 있었다. 이 때문에 한 때 외설과 예술의 차이가 모자이크에 있다는 우스갯소리도 떠돈 적이 있다. 모자이크가 별 것 아닌 것을 오히려 과대 포장하는 데 쓰여 온 것이라는 점에서 이와 다를 바 없다. 비슷한 예로 공중파 프로그램에서도 상표를 가린다는 명분으로 모자이크를 남발한 적이 있다. 그렇게 되면 해당 상표에 대한 궁금증이 더 커진다는 점을 악용한 것이다.

또 모자이크는 사실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시청자들은 모자이크 처리가 등장하면 실제 인물들이 등장했다고 믿게 마련이다. 리얼리티나 준리얼리티, 재연 프로그램들은 이 점을 노린다. ‘독고영재의 현장르포 스캔들’ 같은 프로그램은 재연 상황에서도 굳이 모자이크 처리를 해왔다. 사실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몰래 카메라 식 앵글도 종종 활용해왔다. 이 때문에 실제 상황과 고의로 혼동하게 한다는 비난 여론과 방송위원회 경고 조치를 자초해왔다.

무엇보다도 케이블 채널 프로그램 제작진이 모자이크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것이 어떤 상황에서도 면죄부, 즉 온갖 법적인 시빗거리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라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가 지난 1월17일 ‘아찔한 소개팅’(M.net)에서 벌어졌다. 청춘 남녀의 진솔한 소개팅을 소개한다는 취지에 어울리지 않게, 한 유부녀가 이 프로그램에 등장했다. 제작진은 해당 출연자의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한 채 방송을 내보냈다. 이 날 방송은 오히려 인터넷 상에서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심지어 인터넷상에서는 모자이크 처리된 화면에서 모자이크를 지우는 복원 프로그램까지 인기를 끌었다. 제작진은 출연자가 유부녀라는 사실을 지나치게 늦게 알아 프로그램을 대체하거나 편집할 여유가 없었다고 변명했다. 과연 그럴까. 그보다는 모자이크 처리의 힘을 과신했을 가능성이 높다. 모자이크가 시청자의 시선은 잡아끌고 문젯거리는 사전에 없애준다면, 프로그램 제작진 입장에서 모자이크는 ‘가제트의 만능 팔’만큼이나 위력적이다.

그러나 케이블 채널들이 간과하는 점이 하나 있다. 이런 계산이 근시안적이라는 사실이다. 시청자들은 이런 기만적인 제작 방식에 금방 싫증을 느낀다. 요즘 케이블 매니아들은 모자이크 처리만 보면 채널을 돌린다. 대신 그들은 영화 채널에서 스타일 전문 채널에 이르기까지 ‘모자이크 청정 지역’을 즐겨 찾는다. 최근 조짐을 보이고 있는 케이블 채널의 인기 판도 변화는, 모자이크를 남발해 시청권을 방해한 케이블 채널이 자초한 면이 크다.

이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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