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흑인·최고령…누가 돼도 '사상 처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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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호 04면

2008년 미국의 대선은 성(性)과 인종·종교 등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달 31일 힐러리·오바마 후보의 TV 토론회가 열린 로스앤젤레스 코닥극장 바깥에 모인 지지자들의 모습.AFP=연합뉴스

2008년 미국 대선에는 현직 대통령이나 부통령이 출마하지 않는다. 1928년 이후 8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이런 선거를 미국에선 ‘Open Seat Election’이라고 부른다. 자리의 주인이 없는 상태에서 치러지는 선거라는 뜻이다. 그러니 민주·공화 양당에선 각각 8명이 출마를 선언했을 정도로 대통령 자리를 노린 사람이 많았다. 1월 3일 실시된 아이오와 코커스(당원대회)와 이후 뉴햄프셔·네바다·사우스캐롤라이나주 경선을 거치면서 양당에선 중도 포기한 대선 주자들이 속출했다. 하지만 양당 선두주자들 간 경쟁은 여전히 치열하다.

예비선거 특징과 쟁점

이번 대선은 여러 면에서 특징적이다. 미국 역사상 최초로 여성 또는 흑인 대통령이 나올 수 있는 상황이다. 여성인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 흑인인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은 민주당 경선의 선두주자다. 둘 다 당의 후보가 될 수 있고, 본선에 나가도 당선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둘 중 한 사람은 11월 4일 대선에서 미국 역사에 새로운 장(章)을 열지 모른다.

공화당의 경우 선두주자로 압축된 존 매케인 상원의원이나 미트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도 역사를 새로 쓸 수 있는 인물이다. 베트남전 영웅으로 현재 71세인 매케인이 대선에서 승리할 경우 최고령 당선자가 된다. 그가 2009년 1월 72세로 취임하면 69세 때 백악관에 입성했던 고(故)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기록을 갈아치우게 된다.

롬니는 소수종교인 모르몬교 신자다. 미국 인구의 2% 정도가 모르몬교를 믿는다. 그런 종교를 가진 롬니가 다수의 기독교 신자가 지지하는 공화당의 대선 경쟁에서 선두권에 들어 있다. 침례교 목사 출신인 마이크 허커비 전 아칸소 주지사는 ‘기독교 지도자’임을 자처하며 보수적인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의 표를 끌어 모으고 있다. 이처럼 이번 대선엔 인종과 성(性), 종교, 나이 등의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와 함께 경제불안, 이라크전, 의료보장, 이민 등의 이슈도 표의 향방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사안이다.

인종
민주당의 가장 뜨거운 이슈로 부상했다. 힐러리 진영이 이 문제를 은근히 건드리고, 오바마 진영이 말려들면서 인종은 이제 둘 사이의 승부에 큰 영향을 미치는 변수가 됐다. 지난달 26일 실시된 민주당 사우스캐롤라이나 프라이머리(예비선거)에서 오바마(득표율 55%)가 힐러리(27%)에게 압승한 건 흑인 표가 오바마에게로 몰렸기 때문이다. 오바마는 전체 투표자의 53%인 흑인층에서 80%의 지지를 받았다.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힐러리는 흑인층에서 인기가 높았다. 지지율도 오바마보다 앞섰다. 그런 그가 갑자기 흑인의 지지를 대거 상실한 건 그의 진영에서 흑인을 자극하는 발언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이라크전에 대한 오바마의 태도를 비난하면서 ‘동화(童話)’라는 표현을 썼다. 그 말에 흑인은 분노했다. 흑인인 오바마의 대선 도전을 동화 같다고 야유한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인권운동을 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꿈은 1964년 린든 존슨 당시 대통령의 인권법 제정으로 현실화됐다”는 힐러리의 발언도 흑인의 반감을 샀다. 흑인 영웅인 킹 목사를 헐뜯은 것으로 흑인은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클린턴은 흑인의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걸 알면서도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오바마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다.

과거 클린턴의 선거참모였던 딕 모리스는 “힐러리 측이 인종 문제를 쟁점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극했다”고 분석한다. “흑인이 오바마 쪽으로 몰릴수록 백인층에서 반발이 생길 것임을 염두에 둔 전략”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오바마의 백인층 지지율은 하락하고 있다. 흑인과 일자리를 놓고 오랫동안 경쟁해온 히스패닉계도 힐러리 쪽으로 쏠리고 있다. 히스패닉 숫자는 미국 전체 인구의 14.8%로, 흑인(12.9%)보다 많다.


아이오와에서 패배한 힐러리를 구한 건 뉴햄프셔의 여성이었다. 힐러리는 그곳에서 선거운동을 하던 중 “여자로서 얼마나 어려우냐”는 질문을 받고 “정말로 힘들 때가 많다”고 답하면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런 인간적인 모습이 상당수 유권자들의 감성을 자극했다. 투표함을 연 결과 힐러리는 대패할 것이라는 여론조사와 달리 약 3%포인트 차이로 이겼다.

만일 이곳에서 힐러리가 졌다면 대세는 오바마에게로 기울었을지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여성들은 힐러리에게 몰표를 줬다. 여성의 47%가 힐러리를 지지했다. 오바마는 여성 표의 35%를 받았다. 힐러리는 전국 여론조사에서 오바마에 10%포인트 정도 앞서 있다. 남성보다 투표장에 열심히 나가는 여성층에선 그보다 격차를 더 벌려놓고 있다. 반면 남성층에선 오바마가 힐러리를 앞서고 있다. 하지만 그 격차는 여성층의 차이보다 작다. 오바마는 인종과 성의 변수에서 상대적으로 불리한 입장에 놓여 있다.

종교
공화당 경선의 중요한 변수 중 하나다. 허커비가 아이오와에서 이긴 건 복음주의자들의 집단 지지 때문이다. 그는 복음주의자가 많은 남부 지역에서 선전하고 있다. 시선을 끄는 사람은 롬니다. 그는 고향 미시간과 모르몬교도가 많이 사는 네바다에서 승리했다. 기독교인의 대다수는 여론조사에서 모르몬교 신자를 찍지 않겠다고 응답하고 있지만 롬니는 여러 곳에서 매케인과 선두 다툼을 하고 있다. 그가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강조하고, 강한 보수성향을 표출하며, 선거운동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고 있기 때문에 선전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기타
미국 유권자가 선택의 가장 중요한 잣대로 삼는 건 경제다. 주택시장 불안에서 촉발된 경기침체 조짐이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하는 상황까지 왔기 때문이다. 벤처투자자문회사를 운영하며 엄청난 부를 일군 롬니가 ‘경제 해결사’임을 강조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민주당의 경우 이라크전이 가장 큰 이슈가 됐을 땐 이 전쟁에 반대한 오바마가 유리했다.

하지만 유권자의 최고 관심사가 경제로 이동한 뒤부터는 힐러리가 덕을 보고 있다. 경험이 많은 힐러리가 경제 문제를 더 잘 다룰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오바마는 ‘변화’의 이슈를 선점했다. 그걸로 그는 젊은 층을 대거 끌어당겼다. 피부암을 세 번 극복한 매케인의 가장 큰 약점으론 고령이 꼽힌다. 허커비를 지원하는 유명 배우 척 노리스는 “매케인은 나이가 많아 안 된다”는 얘기를 노골적으로 하고 다닌다.

다른 후보 진영에서도 “매케인의 건강에 무슨 이상이 생길지 모른다”는 말을 유포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매케인은 “95세의 어머니가 아직도 살아계신다. 나는 어머니의 체질을 물려받았다”고 반박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다. 이민문제는 민주·공화당의 입장이 첨예하게 엇갈리는 사안이다. 공화당은 불법 이민을 철저하게 단속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매케인은 불법 이민자에게 합법적 신분을 부여하는 길을 열어줘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의 생각은 민주당과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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