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냐 부정선거 시비 ‘인종청소’ 로 번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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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넓은 칼과 창·방망이를 손에 든 폭도들이 거리를 활보한다. 길 한 귀퉁이에선 어린아이가 죽은 엄마의 시신을 붙잡고 절규한다. 사람을 산 채로 불태우고, 흉기로 난자하는 모습도 보인다. 한 달 이상 소요 사태가 계속되고 있는 아프리카 케냐의 상황을 전한 외신 보도다.

지난해 말 대통령 선거 부정 시비로 촉발된 야권의 대규모 시위가 부족 간 유혈 충돌로 번지며 지금까지 최소 8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난민도 30만 명 이상 발생했다. 부정 선거의 주역인 므와이 키바키 대통령이 속한 키쿠유족과 그와 대결을 펼친 야당 지도자 라일라 오딩가를 낳은 루오족 사이에 공격과 복수를 거듭하는 광기의 살육극이 벌어지고 있다. 나머지 40개 부족도 서로 편을 나눠 살육극에 가담하고 있다.

중재를 위해 케냐를 방문 중인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의 노력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미국 국무부의 젠다이 프레이저 아프리카 담당 차관보는 30일 “케냐에서 인종 청소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고 우려를 표시했다. 유럽연합(EU)은 “케냐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인권침해와 체계적 폭력행위를 비난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인종 청소로 번지는 소요 사태=지난해 12월 27일 키바키 대통령의 재선이 발표된 직후 촉발된 폭력 사태는 31일까지도 진정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야당 지도자 오딩가를 지지하는 지역에선 키쿠유족에 대한 공격이, 키쿠유족이 다수인 지역에선 루오족에 대한 보복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 30일 수도 나이로비 북서쪽에 있는 나비사에선 키쿠유족 주민들이 19명의 루오족 주민을 집에 가두고 불을 질러 몰살시켰다. 희생자 중엔 어린이들도 포함돼 있었다. 케냐에서 셋째로 큰 인구 50만 명의 도시 키수무에선 키쿠유족 주민 2만 명이 루오족의 공격을 피해 도시를 떠났다.

이런 가운데 키바키 대통령은 자신이 적법한 선거로 뽑힌 대통령이라고 버티고 있다. 대선 결과가 조작됐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는 오딩가도 “키바키가 폭도들을 동원해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다”고 비난했다.

◇해묵은 부족 간 갈등이 주요 원인=키바키 대통령의 출신 부족인 키쿠유족은 1963년 케냐가 영국에서 독립한 이래 단 한 번도 정권을 다른 부족에 내준 적이 없다. 42개 부족 중 제일 크지만 주민(810만여 명)은 케냐 전체 인구(3691만 명)의 22%에 불과하다. 그러나 국부(國富)의 대부분은 키쿠유족이 쥐고 있다. 82년 키쿠유족 중심의 집권 카누(KANU)당은 헌법을 바꿔 케냐를 1당 지배 국가로 만들었다. 91년 헌법을 다시 고치긴 했지만 키쿠유족은 여전히 지배계층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단순히 종족 간 갈등으로만 보기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선거 부정이나 종족 간 갈등은 케냐에서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AP 등 외신들은 “늘어나는 인구에 비해 제대로 된 일자리가 생기지 않는 것이 더 큰 원인”이라고 풀이했다. 30년대 초 290만 명에 불과했던 케냐 인구는 현재 3600만 명을 훌쩍 넘어섰다. 교육을 제대로 받은 젊은 세대도 많아졌다. 그러나 일자리는 그만큼 생겨나지 않았다.  

유철종·이수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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