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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티김과 글로벌의 조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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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소녀는 교실 맨 뒷자리에 앉았다. 선생님은 여고생 언니들에게 시조를 가르치고 있었다. “청산~~~리 벽~계~~수~~야.” 선생님이 한마디하면 학생들이 따라했다. “누구 한번 불러볼 사람?” 선생님이 물었다. 모두 입을 다물었다. 소녀가 번쩍 손을 들었다. “잘하는데. 이름이 뭐지.” “김혜자입니다.”

선생님은 국악학원에 나오라고 권했다. 월사금도 빠듯했던 소녀의 형편을 알고 무료로 가르쳤다. 소녀는 ‘심청가’를 뗐고, 단가(短歌)도 배웠다. 고교 입학 직전 덕성여대 주최 전국 중·고교 국악콩쿠르에서 1등을 했다. 소녀는 그렇게 1년반을 국악과 함께했다.

집에서 난리가 났다. ‘창을 하면 기생밖에 할 게 없다’고 믿던 시절이었다. 소녀도 국악에 일생을 바칠 생각은 없었다. 운명이랄까. 몇 년 뒤 소녀는 미8군 무대에 섰다. 1959년의 일이다. 서구적 외모와 폭발적 가창력으로 객석을 압도했다. 당대 최고 작곡가 박춘석씨도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데뷔 50주년을 맞은 패티김(본명 김혜자) 이야기다. 최근 만난 그는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했다. 일흔 나이가 믿기지 않는 파워와 미모가 대단했다. 그가 국악콩쿠르 출신인 걸 처음 알았다. 사실 그는 ‘사랑의 맹세’ ‘서머타임’ 등을 데뷔앨범에 실으며 한국에 팝송을 불러들인 주역이다. 팝·샹송·칸초네 등 그가 부른 외국 노래만 200곡이 넘는다.

패티김은 단언했다. “국악은 내 음악의 기반이다.” 그는 중3 시절을 다시 꺼냈다. “선생님은 학생들을 데리고 종종 남산에 올라갔죠. 목이 터져야 좋은 소리가 나온다는 거죠. 솔직히 피 한번 터진 적이 없어요. 하지만 탁성과 긴 호흡을 배웠죠. 고음이 몇 소절씩 이어지는 대목에서도 호흡이 끊어지지 않는 건 그때 닦은 기본기 덕분입니다.”

그는 60년대 초·중반 세계무대에도 진출했다. 동남아는 물론 미국 라스베이거스·뉴욕·로스앤젤레스 등지에서 활동했다. 팝송을 신비한 음색으로 부른다는 호평을 받았다. 그의 노래 밑에 깔린 창 때문이다.

데뷔 40주년을 맞은 조용필도 “판소리와 창이 큰 힘이 됐다”고 말한 적이 있다. 미성의 청년 조용필은 70년대 후반 ‘흥부전’의 탁성을 연마하며 ‘가왕’의 발판을 만들었다. 흥미로운 교집합이다. 가요계 양대 산맥인 그들의 오랜 생명력은 ‘한국적인 것’의 결과물이다.

대통령직 인수위가 추진 중인 ‘영어교육 개혁안’을 보며 패티김과 조용필을 떠올렸다. ‘영어, 앞으로’가 우리의 생존 조건이라는 걸 모르진 않지만 뭔가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수단인 영어가 목적처럼 호도된 느낌마저 들었다. 생뚱맞은 생각도 했다. 국어교육 개혁안도 함께 발표했으면 신선하지 않았을까. 문화의 핵심, 국가의 파워는 상상력이고, 또 그것은 우리말(글)로 발현되기 때문이다. 국악의 뒷받침없는 한국 음악의 세계화가 없듯 국어의 담금질없는 문화 한국은 없을 터다.

‘한류의 원조’ 패티김과 조용필은 그 단초를 보여주었다. 토플에서 만점을 받는다고 글로벌 스탠더드가 절로 갖춰지지는 않을 것이다. 되레 더듬더듬 영어 몇마디 못했던 숭산 스님은 숱한 벽안(碧眼)의 제자를 통해 한국 선불교를 세계에 떨쳤다. 영어 하나로 우쭐하거나 주눅들지 않는 그런 사회, 그런 시스템에 대한 새 정부의 묘책을 기대하는 건 백면서생(白面書生)의 백일몽일까. 우리가 없이는 선진화도 없다.

박정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