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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대한민국탄생>7.유학생시절 독립운동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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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이승만(李承晩)이 미국에 처음 건너갔을 때는 단지 2~3년간그곳에 머무를 작정이었다.그러나 1905년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외교권이 박탈당하면서 조국이 일제(日帝)의 식민지로 전락될전망이 뚜렷해지자 그는 귀국일정을 늦추고 공부 를 계속했다.하버드大와 프린스턴大에 적을 둔 이승만은 미국을 방문하는 애국지사와 접촉하거나 재미(在美)교포들과 협조하면서 간간이 국권수호운동을 전개했다.
미국 유학기간중 이승만은 기회있는 대로 미국인 교회와 YMCA등을 찾아다니며 1백40회 이상 한국의 독립을 역설하는 설교와 강연을 했다.뿐만 아니라 그는 가끔 미국 동부에서 열린 국제기독교 대회에 한국 대표로 초청받아 수천명 청중 앞에서 한국과 관련된 연설을 했다.이러한 활동을 펴던 중 1907년 여름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했다가 8월1일 뉴욕을 방문한 진귀한 한국 손님 이상설(李相卨)을 맞았다.이승만은 이 때 이상설의 루스벨트 대통령 회견을 주선했지만 루스벨트측의 거절로 실패한 것같다.그들은 앞으로의 독립운동 방략에 관해 숙의한 후 서로 헤어졌다.
하버드大에 입학한 후 더욱 명성이 높아진 이승만은 장인환(張仁煥).전명운(田明雲)두 의사의 스티븐스 포살사건(1908년3월23일)이 일어나기 전(3월4일)부터 미국 서부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는 공립신보(共立新報)에 투고,재미 한 인교포들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교포를 대상으로 하는 언론-정치활동의 연장으로 그는 1908년 7월10~15일간에 콜로라도州 덴버에서개최된「애국동지대표자대회」에 참석했다.이 모임에는 윤병구(尹炳求).박용만(朴容萬)등 이승만 지지자 를 비롯한 36명의 대표가 참석했으며,회의는 스탠퍼드大 총장 조던의 개회사로 개막됐다.이 대회에서 이승만은 의장(議長)으로 선출돼 결의안 채택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이 회의는 미국에 산재한 한인 단체들을 하나로 통합,국사(國事)를 도울 것과 한국민의 교육에 필요한 서적을 저술.번역해 발행할 것등을 결의했다.이러한 온건-점진주의적 독립운동노선은 당시 이승만의 생각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있다.여하튼 덴버회의를 계기로 이승만은 재미 한인 교포사회 일각에서 최고 지도자로 부상했으며 이 점에서 덴버회의는 그의 정치적 생애에 이정표적 의의가 있었다.
이 회의가 끝난 다음 8월4일에 영국 데일리 메일紙의 기자로서『한국의 비극』(1908)이란 명저를 펴낸 매켄지는 런던에서이승만에게 축하와 격려의 편지를 보내주었다.이글에서 매켄지는 한민족이 일제로부터 당하는 불공정과 억압은 거시 적으로 볼때 한국민 전체를 분발시키는 효과가 있을 것이며 앞으로 한국은 좀더 위대한 나라,즉「아시아 최초의 기독교 국가이자 20세기 진보의 선구자」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면서,이승만.박용만 등 대회지도자들의「용감한」독립수호노력을 치 하했다.특히 그는 덴버회의대표들이 한민족의 정신력 강화와 서양학술의 도입.보급을 당면 목표로 설정한 것은 현명한 처사였다고 칭찬하면서,『스티븐스를 저격한 일부 인사들의 행위는 바보 짓』이라고 덧붙였다.스티븐스포살사건에 대한 매켄 지의 이러한 부정적 평은 대체로 기독교국가 지성인의 여론을 대변한 것이었으며 동시에 그당시 이승만의 가치관과 일치하는 것이었다고 여겨진다.
덴버회의를 마친뒤 이승만은 미국 서부의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해 그곳에 근거를 둔 두 개의 한인 교포단체,즉 공립협회(共立協會)및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의 지도자들과 접촉했다.이승만이 미국 서부의 교포사회에 발을 들여놓 자 안창호(安昌浩)중심의 관서(關西)출신 인사들로 구성된 공립협회는 비교적 냉담한 반응을 보여준 반면,문양목(文讓穆).안정수(安定洙).장경(張景)등 기호(畿湖)출신 인사들이 우세한 대동보국회는 이승만을 자신들의 영도자로 추대하기로 정하고 회장 문양목등 간부 5명의 연명으로「이승만 대정각하(大政閣下)」에게 혈서(血書)-진정서-를 바쳤다.심지어 대동보국회측에서는 1910년초에 로스앤젤레스에 대동신서관(大同新書館.사장 문양목)을 설립하여 이를 통해 이승만의 옥중저 서『독립졍신』을 출판해 주기까지 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교포단체의 통합을 주장해온 이승만은 대동보국회 가입을 보류하고 양대 교포단체에 대해 불편부당(不偏不黨)의 입장을 견지했다.이윽고 1910년 2월10일을 기해 이 단체들이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로 통합되자 그는 이 단체에가입을 신청해 1910년 3월21일자로「국민회 입회증서」를 교부받았다.
미국유학중 프린스턴大 총장 윌슨은 남에게 이승만을 소개할 때「미래 한국 독립의 구원자」라고 진담반.농담반으로 평언했다.
이 무렵 한국인들간에도 이승만의 잠재적 가치를 높이 사 그를「각하」라고 부르는 이가 있었고 그에게 정치헌금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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