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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인간서 회생 서양화가 변종하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3면

화려한 색채,꽃나무와 새-.
간결한 형상 속에 꿈꾸듯 신비로운 색채감각을 구사했던 서양화가 변종하(卞鍾夏.69)씨가 오랜 투병생활끝에 다시 화단으로 돌아왔다.
88년 갑작스런 뇌혈관경색증으로 한때 식물인간 신세로까지 내몰렸던 卞씨.
10일부터 28일까지 갤러리현대에서 개인전을 갖게된 그가 오랜 병상을 떨치고 다시 시작하는 화가의 길을 설렘속에 기다리고있는 것이다.
『서정적 풍경』 이란 전시제목을 손수 정한 卞씨는 이 전시에서 유화작업 60여점과 판화 40종,도자기그림 50점 등 모두1백50여점을 선보일 계획이다.아직도 어지럼증 때문에 앉아서만생활하는 卞씨가 부실한 몸을 이끌고 그린 그림 으로서는 적지않은 양이다.이번 전시회에 소개되는 그의 작품들은 여전히 새와 꽃,나체의 여인들을 소재로 등장시키고 있지만 색채와 형태에서는전과 판이한 작업들이 꽤 눈에 띈다.
대부분이 마치 크레용을 처음 손에 쥔 어린아이가 그린 것처럼선이 흐트러지고 색도 마구 번져 중첩돼 보인다.
『사심도 욕심도 없이 도인(道人)처럼 돼야 그림이 좋아집니다.예전에 그렸던 그림을 다시 보니 욕심이 더덕더덕한 것 같습디다.』짧게 깎은 머리에 수염이 더부룩한 卞씨는 병중(病中)임도잊은듯 과거 달변의 이론가 모습으로 되돌아가 『추사 선생의 만년작품에선 어린아이같은 천진함이 느껴집니다.피카소가 좋은 것도그 천진무구함 때문입니다』고 설명한다.유심히 살펴보면 흩어진채번져있는 색채 속에서 스타일리스트로서의 그의 성격이 여실히 드러나는 화려함과 세련됨이 숨어있다.
70년대 그가 창안해낸 평면속의 입체작업,즉 요철이 있는 작업들이 작은 꽃송이 하나까지 세심하게 부각시키는 공예적 장식미에 치중했다면 이번 작업들은 그의 혈관속을 흐르는 그 공예적 감성이 한데 뭉뚱그려져 표현성짙은 회화를 만들어내 고 있다.
10년만에 갖는 이번 개인전에서 卞씨가 특별히 욕심내는 부분은 삭인 색을 통해 한국적 서정성을 드러내 보겠다는 것이다.
다시는 그림을 그릴수 없을지도 모르는 절망적인 병마 속에서 오랜시간 동안 머릿속에서만 그림에 대한 생각을 삭였듯이 색채도있는 그대로의 액티브한 색이 아니라 마치 김치처럼 한번쯤 발효과정을 거쳐 곰삭아 익은 색이 우리의 서정을 나 타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한국적 서정성을 알면 굳이 미국이나 서구문화를 받아들일 필요가 없습니다.이번 전시는 좋은 서정적 감성의 본보기를 한번 보여주자는 것입니다.』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판화작업도 파리와뉴욕,도쿄의 이름난 판화공방 3곳을 선정해 서로의 경쟁속에서 최고를 만들게 했다.
당뇨병 합병증으로 88년 가을 갑자기 쓰러진 卞씨는 90년봄깨어날 때까지 꼬박 1년반을 식물인간으로 병원신세를 졌다.그후의식은 조금씩 되돌아왔지만 신경을 다쳐 왼손이 마비되고 조금만일어서면 심한 어지럼증에 시달려야만 했다.9 0년가을부터 통증을 잊기위해 이를 악물고 붓을 들어 말 그대로 죽기아니면 살기로 그림을 그렸다.
요즘도 새벽에 일어나 꼬박 4시간씩 작업하는 卞씨는 이번 개인전을 앞두고 무리를 거듭하다 끝내 한쪽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을 다치기도 했다.卞씨는 이번 전시를 마치고 거동이 조금 나아지면 2층화실에 몇년째 방치해둔 조각작업 들을 다시 꺼내 마무리하는 것을 새봄의 소망으로 삼고 있다.
尹哲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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