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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 남자들의 의리요? “믿을 것 못 돼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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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금지옥엽’‘첨밀밀’‘퍼햅스 러브’ 등 로맨스물로 이름난 홍콩 출신의 천커신(陳可辛·47·사진·右) 감독이 뜻밖에도 시대액션물을 내놨다. 리롄제·류더화·진청위 세 톱스타가 주연을 맡은 대작 영화 ‘명장’(원제 투명장)이다. 중국에서는 지난 연말 개봉 이후 2억 위안(260여억원)이 넘는 흥행성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명장’은 난세에 피로 맺어진 의형제가 처절한 배신을 겪는 이야기다. “나도 내가 액션물을 만들 줄 몰랐다”는 감독의 첫 액션물이건만 화려한 액션, 야망과 의리가 충돌하는 드라마가 고루 탄탄하다. 알고 보니 그가 데뷔 이후 첫 액션영화로 20년 넘게 꿈꿔온 이야기다. 국내 개봉(1월 31일)을 앞두고 한국을 찾은 그를 만났다.
 
-영화의 모티브는 청나라 말기 태평천국의 난 당시의 실제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외팔이’시리즈로 유명한 장철 감독이 1970년대에 영화 ‘자마(刺馬)’로 만들기도 했던 소재인데.
 
“실은 열한 살 때 그 영화를 처음 보고 당시 적룡이 연기한 주인공의 캐릭터에 빠져들었다. 악역인데도 흰옷을 멋지게 차려입은 품격 있는 인물이었다. 그를 보면서 과연 선이 뭐고, 악이 뭔지 엄청난 혼란을 겪었다. 어렸을 때는 선과 악의 기준이 뚜렷하지 않나.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선악의 기준이 굉장히 주관적이라는 걸 깨달았다. 영화 속에서 조이호(류더화)나 강호양(진청위)이 방청운(리롄제)에 비해 좋은 사람 같지만, 사실 그들이 한 일은 살인과 도적질이었다. 더구나 굶주린 농민이 도적떼가 되는 난세였으니 더 기준이 모호했을 것이다. 어쩌면 현대사회와도 닮았다. 홍콩 감독이면서 왜 액션영화를 안 찍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액션을 찍는다면 ‘자마’를 리메이크하고 싶다고 말해 왔다.”
 

-세 주연 가운데 리롄제의 연기가 특히 돋보인다. 대의를 앞세운 야망과 의형제의 신의 사이에서 배신을 선택하는 방청운을 절묘하게 표현한다. 실제 나이로만 따지면 류더화가 맏형 격인데.
 
“물론 류더화도 뛰어난 연기자지만, 리롄제는 이런 역할을 해본 적이 없다. 전에 해보지 않은 역할을 맡기는 게 배우의 밑바닥에 숨겨진 것을 끄집어내는 비결이다. 리롄제는 뛰어난 쿵후 실력으로 열두 살 때 이미 덩샤오핑을 만나고, 미국의 닉슨 대통령 앞에서도 시연을 펼쳤던 스타였다. 하지만 당시 한 달 수입은 5위안에 불과했다. 홍콩에서 영화 ‘황비홍’시리즈로 또다시 전성기를 맞았지만, 조폭세력에 매니저가 목숨을 잃는 사건까지 겪었다. 리롄제는 중국에서 문화혁명기에 어린 시절을 보냈고, 개혁·개방의 질풍노도를 두루 겪었다. 방청운과 닮은 성장 배경이다. 배우가 보여주는 캐릭터는 결국 연기지만, 그 연기에는 배우가 겪어온 감정이 묻어나게 마련이다. 리롄제가 방청운을 진심으로 연기할 수 있는 배우라고 믿었다.”
 
-무고한 희생을 안타까워하는 조이호(류더화)의 모습은 류더화가 연기한 영화 ‘묵공’의 혁리를 연상시키는데.
 
“그 둘은 전혀 다른 인물이다. 혁리는 지식인이고 이상주의자였다. 조이호는 생각과는 전혀 거리가 먼 인물이다. 그래서 전장에서 그처럼 용감할 수도 있었고. 방청운이 실용주의적인 현대의 CEO라면, 조이호는 전통적인 낭만주의자라고나 할까. 모든 백성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주변 사람을 먹여살리는 게 조이호의 전부다.”
 
-빠른 편집으로 액션의 묘미를 살리면서도 전쟁의 잔혹함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액션이 인상적이다.
 
“당시의 전쟁을 밖에서 보면 몇천 명이 싸우는지 규모가 보였겠지만 그 속에서 싸우는 병사가 보는 것은 남을 죽여야 하는, 아니면 곧 자기가 죽을 것 같은 긴박함뿐이었을 것이다. 제3자의 관점이 아니라 그 병사의 느낌으로 찍으려고 했다. 몇몇 불가피한 장면을 제외하면 CG도 거의 쓰지 않았다.”
 
-흔히 남자들의 의리를 내세우는 통념과는 좀 다른데.
 
“가족의 정, 연인의 정, 친구의 정 중에 나는 세 번째를 제일 믿지 않는다. 술에 취하면 남자들끼리 평소에 하지 않던 말을 하면서 서로 좋아한다고들 하지 않나. 이게 너무 허구적이다. 당사자는 진심이라고 믿을지 몰라도, 그게 스스로를 속이는 것일 수 있다. 내가 술을 전혀 마시지 않는 것이 문제일지도 모르지만.”(웃음)

영화 ‘명장’은 …

참혹한 전투에서 병사를 모두 잃고 비참하게 살아남은 장수 방청운(리롄제)은 도적떼의 두목 조이호(류더화)·강오양(진청위)과 의형제를 맺고, 이들을 군대로 끌어들인다. 굶어 죽느니 봉급 받고 싸우자는 취지다. 처절한 전투를 거듭하면서 생사고락을 함께한 세 남자는 더 큰 대의를 겨냥한 맏형 방청운의 야심이 특히 둘째 조이호와 갈등을 빚으면서 참혹한 파국을 맞는다. 조이호의 아내(쉬징레이)를 둘러싼 비밀스러운 삼각관계도 겹쳐진다.

글=이후남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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