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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독재형 정부 조직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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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신·구 권력의 갈등이 정점으로 치닫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22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마련한 정부조직법 개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가능성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인수위의 정부 업무보고 과정, 그리고 김만복 국가정보원장의 사표 수리를 놓고 수위를 높이던 갈등이 마침내 일촉즉발의 국면으로 전개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노 대통령은 정말로 거부권을 행사할까.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은 기자들과의 문답에서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그 이유로 “현 정부에 절차도 졸속이고, 철학도 맞지 않은 개편안에 서명하라고 하면 그건 정치 도의상 매우 부당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번 개편안은 절차가 부실하고 개발독재 시대에 맞는 제왕적 대통령 시대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고 규정했다.

 하지만 인수위는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참여정부 지우기’를 가속화하고 있다.

 통일부를 외교통상부와 통폐합하는 게 대표적이다. 노 대통령은 불과 세 달 전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 정상회담을 했다. 그리고 합의사항을 이행하기 위한 후속 실무 회담들이 아직도 진행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통일부가 쪼그라들 경우 김대중 정부의 5년을 포함해 지난 10년간 펼쳐 온 대북 포용정책의 성과가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운명이 된다.

 노 대통령이 이날 “내 철학, 소신과 충돌하는 개편안에 서명하고 수용할 수 있을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 것에서 이런 심경을 읽을 수 있다.

 만일 노 대통령이 국회를 통과한 정부조직법 개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해 국회가 재의결에 실패하게 되면 사태는 심각해진다. 새 정부는 기존 정부 조직대로 조각(組閣)을 하거나 총리만 지명한 채 장관 없이 4월 총선에서 다수당이 된 뒤 정부조직 개편을 다시 추진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물러나는 대통령이 새로 들어서는 정부의 국정 운영 구상을 근본부터 뒤흔드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는 셈이다.

 반면 여야 합의로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만들면 얘기가 달라진다. 거부권을 행사할 명분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나라당 안에선 노 대통령의 발언이 국회에서 시작될 정부조직법 개정안 협상을 앞두고 통합신당으로 대표되는 구 여권 측의 협상력에 힘을 실어 주려는 의도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인수위 측은 이날 공식 반응을 유보했다. 대신 한나라당이 나섰다. 안상수 원내대표는 “신정부가 출범하는 마당에 대통령이 거부권 행사 운운하는 건 국민이 납득하기 어려운 발언”이라고 비판했다. 심재철 원내 부대표는 “완전히 몽니를 부리겠다는 것”이라 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승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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