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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휴먼 신도시’ 건설 중 ① 영국 파운드베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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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①보행자 중심의 도시 설계를 위해 도로가 똑바른 것은 하나도 없고 이리저리 어긋나 자동차가 속도를 낼 수 없도록 설계됐다. 골목길로 이루어져 전체적으로는 무질서한 듯 보이지만 보행자를 위한 배려와 길모퉁이마다 표지가 되는 랜드마크가 배치돼 있다. ②건축 재료는 벽돌이나 자연석으로 제한되며, 지붕도 반드시 경사지붕이어야 한다. 창문도 흰색 창틀에 투명한 유리를 써야 하며, 커다란 통유리 창문은 금지된다. ③찰스 왕세자<中>는 계획 단계부터 지금까지 수시로 파운드베리를 방문해 직접 마을의 진행 정도를 살핀다. [콘월공작실 제공]

영국 도싯의 파운드베리에 가면 마치 오래된 유적지에 관광 온 듯한 느낌이 든다. 런던에서 기차로 세 시간 거리의 남서부에 위치한 도싯 지역의 소도시 도체스터에서 약 2㎞ 정도 떨어져 있다.

찰스 왕세자는 1989년 영국 왕립건축가협회 창립 150주년 기념식에서 “건축가나 도시계획가는 건물이나 도시에 살게 될 일반 대중의 바람보다는 비평가나 동료 건축가들이 어떻게 생각할지에 더 관심을 가진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전통적인 마을과 건축에 대한 꿈을 가진 왕세자가 마침 자신의 영지에 도시개발 수요가 생기자 직접 마을 건설에 나선 것이다. 파운드베리의 특징은 몇 가지로 요약된다.

◇보행 중심=“파운드베리의 주 교통수단은 ‘걷기’ 또는 ‘자전거 타기’”라고 도로 담당 엔지니어인 이언 매그윅은 설명했다. 따라서 “파운드베리 도로 설계의 핵심 목표는 어떻게 하면 자동차가 속도를 못 내고 조심해서 다니도록 만들까 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고 말했다. 자동차 위주의 발상을 완전히 거꾸로 적용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곳에서는 다른 지역과 연결되는 주 간선도로를 빼고는 죽 뻗은 직선도로를 찾기 어렵다. 모두 구불구불한 골목일 뿐, 그마저 집들 사이로 이리저리 어긋나게 배치돼 있다. 마치 집을 모두 지은 뒤 그 사이로 남은 공간을 길로 쓰는 듯한 모습이다. 그러나 이것이 모두 세심하게 계획된 것이란다. 또 걷기 편하도록 상가나 학교 등도 집과 600m, 걸어서 10분 이내에 위치하도록 배치했다.

◇복합용도와 다양성=이곳에서 8년째 ‘맥파이’라는 선물가게를 운영해 온 스테파니 쿠퍼는 “ 가게 위층에서 살고 있는데 많은 동네사람과 알고 지내고 집과 일터가 붙어 있어 생활이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상가와 주택, 오피스 심지어 공장이 모두 섞여 있어 가능한 일이다. 주택도 저소득층 임대주택과 분양주택, 큰 주택과 소규모의 주택, 아파트 등이 같은 블록에 위치해 어느 것이 임대주택인지 알기 어렵다. 파운드베리의 주택 가운데 20%는 기네스 하우징 트러스트가 지원하는 저소득층 임대주택이다. 또 약 10%의 주택은 공유지분제로 임차인이 주택 지분의 일부를 매입하고 나머지는 기네스 하우징 트러스트가 부담하는 형태다. 기네스 트러스트는 1890년 맥주회사 기네스의 소유자인 에드워드 기네스가 기부한 기금을 기초로 조성, 운영되어 온 재단으로 주로 영국 전역의 저소득층 주거 지원에 쓰인다.

초콜릿 공장과 소프트웨어 산업체도 주택 바로 옆에 들어섰다. 초콜릿 공장 지배인 폴 바니는 “공해가 거의 없는 공장이어서 동네 한가운데 있어도 문제가 된 일이 한 번도 없었다”고 말했다.

◇지속 가능성 위한 밀도 높이기=적정한 고밀도가 지속 가능한 사회를 만드는 데 필수적이라는 것이 뉴어버니즘 이론의 주장이다. 고밀도로 사는 것이 토지이용효율을 높이고, 이에 따라 개발 수요를 줄여 자연환경 파괴를 줄일 수 있다. 또 모여 살기 때문에 짧은 거리에서 여러 가지 기능을 해결할 수 있고, 대중교통 수단의 이용도 늘릴 수 있다. 미국의 교외 지역처럼 자동차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환경적인 측면에서 가장 지속 가능성이 낮은 도시 형태라는 것. 따라서 상업 기능과 업무 기능이 주거와 함께 들어갈 뿐 아니라 밀도도 높이는 것이 도시 디자인의 핵심이다.

◇커뮤니티 의식 만들기=파운드베리 주민 회장인 프란체스카 리퍼는 “여기서는 누구나 서로 아는 사이라서 어디를 다녀도 안전하고 편안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실제로 취재하기 위해 마을을 돌아다니는 동안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처음 보는 기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같은 시기에 파운드베리를 취재하던 미국 월간지 트래블 앤드 레저의 마이클 와이즈 기자는 “취재를 위해 돌아다니는 나를 집으로 초대해 차를 대접하는 할머니도 있더라”며 감탄했다. 커뮤니티 의식을 높이기 위해 마을 중심에는 퍼머리 광장을 배치하고 그 주변에 퍼브와 상점들을 배치해 주민들의 만남이 잦아지도록 유도했다.

이 같은 찰스 왕세자의 복고풍 도시 만들기는 부동산 투자 측면에서도 크게 성공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공사가 시작되던 당시 에이커당 4만 파운드 하던 토지가 지금은 에이커당 약 40만 파운드로 10배 가까이 오른 것. 이는 파운드베리가 그만큼 대중적인 호응을 받은 결과다. 그러나 상당수 건축가나 비평가들 사이에서 파운드베리는 아직 논란의 대상이다. 이 같은 신도시가 그저 모조품(patiche)이라거나 왕세자의 장난감 도시(Charlie’s toy town)라는 비아냥도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인간적인 척도의 골목과 주택, 다양한 기능이 공존하는 마을 모습이 편안하게 느껴질뿐더러 주민들이 그것을 자랑스럽게 느낀다는 점에서 파운드베리는 일단 성공적인 출발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파운드베리=신혜경 전문기자



“지붕·창문형태까지 일일이 규제”

개발책임자 사이먼 커니베어

파운드베리 건설과 운영을 맡고 있는 개발매니저인 사이먼 커니베어(사진)를 파운드베리 2단계 공사장 근처에 위치한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파운드베리는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찰스 왕세자의 구상에 따른 마을”이라고 설명을 시작했다. 왕세자는 “현대 도시나 모더니즘의 건축은 인간의 감성을 무시한 형태”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또 “20세기 후반부 50년 동안 무수히 늘어난 영국이나 미국의 교외 주거지들은 자동차 이용을 통해 지나치게 확산되면서 토지의 방만한 이용뿐 아니라 인간적 커뮤니티를 해체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는 “마을을 활기 있게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요인은 밀도”라면서 "ha당 40~50명 이상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국 교외 주거지의 평균 밀도는 ha당 20명이다. 이와 함께 “전통적 마을과 건물 모습은 인간적 커뮤니티 형성을 위한 배려”라고 주장했다. 삭막한 모더니즘 건축보다는 오래된 영국 시골집들이 훨씬 정감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소위 모더니즘풍의 유리와 철골 또는 콘크리트로 된 박스 스타일의 건축은 일절 금지했으며, 지붕의 형태와 창문 모양, 굴뚝을 반드시 설치해야 되는 등 아주 까다로운 규정이 파운드베리 건축 전체에 적용되고 있단다.

파운드베리를 취재하는 동안 보행자 위주의 골목인데도 자동차를 이용하는 사람을 자주 마주쳤다고 지적하자 그는 “아직은 주민들이 과거의 습관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지만, 차츰 보행이 편리한 이곳 환경에 익숙해지고 휘발유 값이 오르는 등 여건이 변하면 걷거나 자전거를 이용하는 쪽으로 변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는 "전체 인구 중 은퇴한 노인 인구가 40% 정도로 많지만 현재 20% 정도인 공공 임대주택의 입주자가 주로 어린 자녀를 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인구의 연령 균형이 잡히는 편”이라면서 “2단계 이후부터는 공공주택의 비율을 35%로 늘릴 계획”이라고 밝혔다.

신혜경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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