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적산가옥 보존 vs 개발 … 어찌 하오리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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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 지 70~100년 된 적산 가옥이 남아 있어 일제시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군산 내항 주변의 신흥동 거리(위 큰 사진). 장미동에는 1908년 지은 옛 군산세관(아래 왼쪽)과 1923년 설립된 옛 조선은행 군산지점(아래 오른쪽)이 있다. 붉은 벽돌 건물인 옛 군산세관은 비교적 잘 보존된 반면, 조선은행은 10여년 전 화재가 난 뒤 방치 된 상태다. [사진=프리랜서 오종찬]

 14일 전북 군산시 내항(內港) 주변에 있는 신흥동의 한 골목길. 2층 목조 주택에 회벽 칠을 한 정갈한 일본식 고급 주택이 눈에 들어온다. 검게 콜타르 칠을 한 목판과 지붕 아래 두 개의 처마로 된 가옥으로 일제시대 때 일본인 포목상이었던 히로쓰(廣津)가 살았던 곳이다. 1925년 지은 이 집은 “근세 일본의 전통적 무가(武家) 양식의 원형이 본토의 그것보다 낫다”고 일본 건축가들이 평가할 정도로 잘 보존돼 있다.

 히로쓰 가옥 주변에선 일본식 집들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한 지붕 아래 3~5가구가 연립주택 형태로 이어져 서민들이 살던 ‘장옥(長屋)’을 볼 수 있고, 일본 에도(江戶)시대 건축양식으로 가파른 지붕이 특징인 사찰 동국사도 있다.

 군산시 신흥동·장미동·영화동 일대에는 이른바 적산(敵産)가옥이 170여 채나 남아 있다. 한글 문패나 간판만 없으면 타임머신을 타고 일제시대의 거리에 들어선 듯 착각할 정도다.

 군산시가 1900년대 초부터 45년 사이에 지어진 이들 가옥의 관광자원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원형이 잘 보존된 적산가옥과 일제시대 사용하던 은행·세관 등 근대 건축물을 둘러볼 수 있는 탐방코스를 만든다는 것. 내국인은 물론 일본·중국 등 외국인을 위한 관광명소가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거리 곳곳에 다도를 재현하는 찻집과 횟집, 상품점을 개설해 일본풍으로 특화할 계획이다. 대부분 개인 소유인 적산가옥은 원형 보존을 위해 외형 유지를 조건으로 개·보수 비용으로 1000만원까지 지원한다.

 하지만 일부 주민은 “일제의 잔재를 싹 쓸어버리고 새 건물을 지어야 한다”며 재개발을 주장한다. 주민 김모(67)씨는 “이곳은 일본이 한반도의 쌀을 착취해 간 수탈의 거리로 현재는 대부분 노인들만 남아 있다”며 “빨리 철거하고 보상금을 받고 싶다”고 말했다.

 실제로 일본도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최근 일본 아사히신문(1월 8일자)은 ‘식민지 지배의 잔재에 흔들리는 일본 통치의 흔적… 개발과 보존’이라는 제목으로 군산의 적산가옥 실태에 대해 보도했다. 이 신문은 “적산가옥으로 불리며 식민 지배의 상징이지만 주로 개발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 지역을 보존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고 전했다.

 ◆일제 때 일본인 1만 명 거주=군산은 일제 때 서해 중부 지역의 관문이었다. 군산항이 호남평야에서 나는 쌀을 운송하는 주요 반출항 역할을 하면서 이 지역에는 한때 일본인이 1만 명 가까이 살 정도로 번창했다. 적산 가옥이 많은 이유다.

 장미동·월명동 등 내항 주변에는 적산가옥 외에도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세워진 관공서도 많다. 붉은 벽돌로 단장한 옛 군산세관은 지은 지 10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옛 모습 그대로다. 서울의 한국은행 본점과 같은 건축양식으로 벨기에산 벽돌을 수입해 건축했다고 한다.

내항 바로 앞에는 건평 1980㎡짜리 옛 조선은행 건물이 서 있다. 지난해 문화재청이 문화재 등록을 예고한 이 건물은 개인이 넘겨받아 고급 술집으로 사용하다 10여 년 전 불이 난 뒤 방치돼 왔다. 이 같은 독특한 거리 풍경 때문에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장군의 아들’ ‘바람의 파이터’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이들 일제시대 건물은 해방 이후 개발 바람을 덜 타면서 오히려 보존에 도움이 됐다. 그러나 10~20년 전부터 군산 시내의 중심 상권이 나운동·미룡동 지역으로 이전하면서 이들 거리가 슬럼화, 적산가옥들은 노후화되고 있다.

 원광대 이경찬(도시공학) 교수는 “역사적 보존 가치가 높은 군산 지역의 근대 건축물이 더 이상 멸실되지 않도록 보존의 손길을 서둘러야 한다”고 지적했다.

문동신 군산시장은 “청소년에게 민족정신을 심어주는 체험 현장이자 훌륭한 관광자원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적산가옥=적산(敵産)의 본래 뜻은 ‘자기 나라의 영토나 점령지 안에 있는 적국의 재산, 또는 적국인의 재산’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선 해방 후 일본인들이 물러간 뒤 남겨놓고 간 집이나 건물을 지칭한다. 해방 후 일반인에게 대부분 불하됐다.

글=장대석 기자 , 사진=프리랜서 오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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