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신은 기어이 그를 불멸의 화가로 만들 작정이었는지, 고흐는 알 수 없는 갈증에 끝없이 시달려야 했고 결국 테오가 있는 파리로 옮겨가 클로젤 거리에 둥지를 튼다. 클로젤 거리는 고흐에게 희망과 고통을 동시에 안겨준 곳이다. 그 거리에 있는 탕기 영감의 상점에서 고흐는 툴루즈 로트레크, 앙크탱, 베르나르, 러셀 등을 만났고 그들과 합류해 작업하면서 인상주의 회화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독한 가난 속에서 오로지 그림 그리는 일만을 구원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고흐와 파리의 멋쟁이 화가들은 처음부터 궁합이 잘 맞지 않았다. 그리하여 고흐는 또 다시 사람들과 단절되는 고통을 맛봐야 했다. 몹시 쇠약해진 고흐는 한동안 좋아하는 산책마저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아 거의 유배생활이나 다름없는 시간들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이것조차도 그에게 정해진 예술사의 수순이었던 것일까. 그의 두 발이 무기력을 앓고 있을 때도 그의 붓놀림은 그 어느 때보다 부지런했다. 바로 그 순간 훗날 거장 고흐를 탄생시키는 강렬한 색채 탐구가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동생 테오에게 그는 이렇게 털어놓는다.
테오야, 어제 나는 성당이 보이는 곳으로 가서 약간의 습작을 하고 돌아왔다. 공원을 그리기도 했지. 하지만 성당보다는 사람의 영혼이 담긴 눈을 그리고 싶구나. 그 아무리 장엄하고 대단한 풍경도 사람의 영혼이 담고 있는 매력을 따라올 수는 없단다. 거지나 매춘부라도 그 영혼은 아름다운거야. 거리의 영혼들을 좀 더 그리고 싶지만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이 힘들다. 그림이 사람을 아주 지치게 하나보다. 하지만 나는 더 좋은 그림을 그리고 싶어. 농촌 아낙을 농촌 아낙답게 그려야 하듯 매춘부 또한 매춘부답게 표현하고 싶다. 나는 램브란트가 그린 매춘부의 초상화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마술가 중의 마술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렇게 그리는 법을 알고 싶어. 마네는 그렇게 하는 데 성공했지. 쿠르베도 그랬고. 망할 자식들! 나에게도 야망이 있어. 졸라, 도데, 공쿠르 형제, 발자크 같은 문학의 거장들이 묘사한 여인의 아름다움을 골수 깊숙한 곳에서부터 느낄 때면 그 욕망은 더 강하게 불타오른단다.
1885 12 28
고흐는 파리의 화가들에게 염증을 느끼면서도 한 편으로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있었다. 베를라는 고흐에게 야외로 나가고 싶은 욕심을 잠재우고 아주 기초적인 실력부터 쌓으라는 충고를 서슴지 않았는데 놀랍게도 고흐는 이를 정중히 받아들여 한동안 스케치와 데생 공부에 공을 들였다.
내게 부족한 것은 훈련이다. 아마 지독한 습작을 50점은 더 훈련한 후에야 뭔가 얻을 수 있겠지. 요새 나는 채색 작업에 시간을 아주 많이 들인다. 살아 있는 그림을 그리기에는 나는 아직 충분히 훈련돼 있지 않아. 하지만 이런 건 시간문제일 뿐 다른 문제는 없어. 나는 더 정확한 붓질을 할 수 있을 때까지 끝없이 훈련을 할 생각이다.
1886년 초
가끔 나는 아주 늙어버린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림에 이토록 매달리지 않았더라면 누군가의 연인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성공하려면 야망을 가져야 하는데 내게는 야망이 어리석게 느껴진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도 잘 모르겠다. 뭣보다 네게 짐이 되고 싶지 않다. 열심히 그림 실력을 쌓아서 네 체면을 구기지 않고도 당당하게 내 그림들을 보여줄 수 있게 되면 좋겠다. 그러면 나는 남부 어딘가로 내려가서 인간적으로 구역질나는 많은 화가들을 보지 않고 지낼 수 있겠지. 내 큰 그림들을 팔기 어렵다는 걸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먼 훗날 사람들은 내 그림 속에서 느껴지는 야외의 신선함을 발견할 수 있을 거야. 그 그림은 시골의 멋진 집을 장식하는데 잘 어울릴 거다. 너도 결혼하면 다른 화상들처럼 시골에 집을 사서 기반을 닦겠지. 확실히 누추해 보이는 것보다는 부유해 보이는 것이 유리하니까 말이야. 자살하는 것보다 유쾌한 삶을 사는 게 더 낫듯이 말이다.
1887년 여름
1888년 2월. 고흐는 결국 파리 생활을 그만 두기로 결심하고 남쪽으로 향한다. 그 어떤 시기보다 강렬한 색채 연구에 열정을 쏟았던 파리에서의 짧은 시간. 이 시간을 더 연장시키지 못한 까닭에 대해서 후세 사람들의 의견은 분분하다. 당시 유행했던 화풍의 영향 탓이었다거나 안식처를 찾아 쉴 새 없이 방황하는 그의 정신력이라는 등 말이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그런 복잡한 해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늘 자연을 경외하고 야외 작업을 사랑하는 고흐에게 파리는 너무 도시적이고 답답했을 것이다. 태양의 아들 고흐의 남쪽 행 결심은 따뜻한 엄마의 품을 찾는 작은 새의 자연스러운 여행이었다. 파리를 떠날 당시 고흐의 정신상태는 전혀 시니컬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사랑을 꿈꾸었으며 주체할 수 없는 열정만이 자신의 재산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은 그가 아를로 떠나기 직전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에 잘 드러나 있다.
객원기자 설은영 skrn77@join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