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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길 (파리 시기 1886 ~1888. 2) ②

중앙일보

입력

1885년 11월. 그러니까 파리로 향하기 몇 개월 전, 고흐는 거리 위로 이젤을 들고 나가 생계를 꾸릴 계획을 세웠다. 그런 이유로 고흐가 선택한 정착지는 아름다운 항구도시 앤트워프. 지금의 안트웨르펜이다. 그의 창작열이 적당(?)했더라면 그쯤에서 자리를 잡고 항구의 풍경 속에 조용히 녹아든 채 평범한 거리의 화가로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신은 기어이 그를 불멸의 화가로 만들 작정이었는지, 고흐는 알 수 없는 갈증에 끝없이 시달려야 했고 결국 테오가 있는 파리로 옮겨가 클로젤 거리에 둥지를 튼다. 클로젤 거리는 고흐에게 희망과 고통을 동시에 안겨준 곳이다. 그 거리에 있는 탕기 영감의 상점에서 고흐는 툴루즈 로트레크, 앙크탱, 베르나르, 러셀 등을 만났고 그들과 합류해 작업하면서 인상주의 회화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독한 가난 속에서 오로지 그림 그리는 일만을 구원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고흐와 파리의 멋쟁이 화가들은 처음부터 궁합이 잘 맞지 않았다. 그리하여 고흐는 또 다시 사람들과 단절되는 고통을 맛봐야 했다. 몹시 쇠약해진 고흐는 한동안 좋아하는 산책마저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아 거의 유배생활이나 다름없는 시간들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이것조차도 그에게 정해진 예술사의 수순이었던 것일까. 그의 두 발이 무기력을 앓고 있을 때도 그의 붓놀림은 그 어느 때보다 부지런했다. 바로 그 순간 훗날 거장 고흐를 탄생시키는 강렬한 색채 탐구가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동생 테오에게 그는 이렇게 털어놓는다.

테오야, 어제 나는 성당이 보이는 곳으로 가서 약간의 습작을 하고 돌아왔다. 공원을 그리기도 했지. 하지만 성당보다는 사람의 영혼이 담긴 눈을 그리고 싶구나. 그 아무리 장엄하고 대단한 풍경도 사람의 영혼이 담고 있는 매력을 따라올 수는 없단다. 거지나 매춘부라도 그 영혼은 아름다운거야. 거리의 영혼들을 좀 더 그리고 싶지만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이 힘들다. 그림이 사람을 아주 지치게 하나보다. 하지만 나는 더 좋은 그림을 그리고 싶어. 농촌 아낙을 농촌 아낙답게 그려야 하듯 매춘부 또한 매춘부답게 표현하고 싶다. 나는 램브란트가 그린 매춘부의 초상화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마술가 중의 마술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렇게 그리는 법을 알고 싶어. 마네는 그렇게 하는 데 성공했지. 쿠르베도 그랬고. 망할 자식들! 나에게도 야망이 있어. 졸라, 도데, 공쿠르 형제, 발자크 같은 문학의 거장들이 묘사한 여인의 아름다움을 골수 깊숙한 곳에서부터 느낄 때면 그 욕망은 더 강하게 불타오른단다.
1885 12 28

고흐는 파리의 화가들에게 염증을 느끼면서도 한 편으로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있었다. 베를라는 고흐에게 야외로 나가고 싶은 욕심을 잠재우고 아주 기초적인 실력부터 쌓으라는 충고를 서슴지 않았는데 놀랍게도 고흐는 이를 정중히 받아들여 한동안 스케치와 데생 공부에 공을 들였다.

내게 부족한 것은 훈련이다. 아마 지독한 습작을 50점은 더 훈련한 후에야 뭔가 얻을 수 있겠지. 요새 나는 채색 작업에 시간을 아주 많이 들인다. 살아 있는 그림을 그리기에는 나는 아직 충분히 훈련돼 있지 않아. 하지만 이런 건 시간문제일 뿐 다른 문제는 없어. 나는 더 정확한 붓질을 할 수 있을 때까지 끝없이 훈련을 할 생각이다.
1886년 초

실내에서의 정물화 작업에 심취한 고흐는 어느 순간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에 호감을 갖게 되었음을 인정했다. 여전히 그들과 어울리지 못 하며 겉돌았지만 그들이 구사하는 색의 향연에는 마음을 열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드가의 누드화와 모네의 풍경화를 무척 좋아했다. 그 영향으로 고흐는 무엇보다 인물화를 집중적으로 그려보고 싶었지만 모델료 걱정 없이 실컷 그릴 수 있는 인물이라곤 그 자신의 얼굴뿐이었다. 그래서 고흐는 이 시기에 더욱 미친 듯이 자화상을 그려내며 비교적 재료값이 저렴한 꽃을 주제로 해서 습작 수업에 무게를 더 했다. 계속되는 노력에 그의 실력은 확실히 좋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카데미의 획일적인 교육형태, 전혀 나아질 기미가 없는 가난 등으로 인해 그의 마음은 여전히 고독하고 심란했다. 특히 자신을 돌봐주는 거의 유일한 존재 동생 테오의 결혼 소식에 큰 소리로 축복해줄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심각하게 비관했다.

가끔 나는 아주 늙어버린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림에 이토록 매달리지 않았더라면 누군가의 연인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성공하려면 야망을 가져야 하는데 내게는 야망이 어리석게 느껴진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도 잘 모르겠다. 뭣보다 네게 짐이 되고 싶지 않다. 열심히 그림 실력을 쌓아서 네 체면을 구기지 않고도 당당하게 내 그림들을 보여줄 수 있게 되면 좋겠다. 그러면 나는 남부 어딘가로 내려가서 인간적으로 구역질나는 많은 화가들을 보지 않고 지낼 수 있겠지. 내 큰 그림들을 팔기 어렵다는 걸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먼 훗날 사람들은 내 그림 속에서 느껴지는 야외의 신선함을 발견할 수 있을 거야. 그 그림은 시골의 멋진 집을 장식하는데 잘 어울릴 거다. 너도 결혼하면 다른 화상들처럼 시골에 집을 사서 기반을 닦겠지. 확실히 누추해 보이는 것보다는 부유해 보이는 것이 유리하니까 말이야. 자살하는 것보다 유쾌한 삶을 사는 게 더 낫듯이 말이다.
1887년 여름

1888년 2월. 고흐는 결국 파리 생활을 그만 두기로 결심하고 남쪽으로 향한다. 그 어떤 시기보다 강렬한 색채 연구에 열정을 쏟았던 파리에서의 짧은 시간. 이 시간을 더 연장시키지 못한 까닭에 대해서 후세 사람들의 의견은 분분하다. 당시 유행했던 화풍의 영향 탓이었다거나 안식처를 찾아 쉴 새 없이 방황하는 그의 정신력이라는 등 말이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그런 복잡한 해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늘 자연을 경외하고 야외 작업을 사랑하는 고흐에게 파리는 너무 도시적이고 답답했을 것이다. 태양의 아들 고흐의 남쪽 행 결심은 따뜻한 엄마의 품을 찾는 작은 새의 자연스러운 여행이었다. 파리를 떠날 당시 고흐의 정신상태는 전혀 시니컬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사랑을 꿈꾸었으며 주체할 수 없는 열정만이 자신의 재산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은 그가 아를로 떠나기 직전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에 잘 드러나 있다.

사랑하는 나의 여동생 윌 보렴. 공부는 사람을 둔하게 만든단다. 제발 공부하겠다는 말만은 하지 말아다오.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생생하게 살아 있어야 한다. 퇴보하고 싶지 않거든 공부 따위는 하지 말아라. 그 대신에 많이 즐기고 다양한 재미를 느껴보렴. 그리고 오늘날 사람들이 예술에서 요구하는 것은 강렬한 색채와 강한 힘을 가진 살아 있는 어떤 것임을 반드시 명심해라. 나는 아직도 말도 안 되는 연애사건을 일으키곤 한단다. 대게는 창피만 당할 뿐이지만 그래도 전혀 후회하지 않아. 너도 알다시피 내가 예전에 종교에 심취했던 적이 있었잖니 지금에 와서 깨달았는데 차라리 나는 그 때에도 사랑에 빠졌어야 했다. 나는 우울증에 걸리거나 비뚤어진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마음먹는 다면 더 자연스럽게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네가 예술가가 되고 싶다면 그렇게 하렴. 마음속에 타오르는 불과 영혼을 가지고 있다면 그걸 억누를 방법은 없단다. 소망하는 것을 터뜨리기보다는 태워버리는 게 낫지 않겠니. 그림을 그리는 일은 내게 구원과 같아.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더 불행했을 테니까 말이야. 어머니께 깊은 사랑을 전해다오. 1887년 가을. 너를 사랑하는 오빠 고흐.

객원기자 설은영 skrn77@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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