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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을 멈추고 기름 속으로 들어가다

중앙일보

입력

환경운동가 이승우 씨(37)가 동계 국토횡단을 잠정 중단했다. 수십 명의 청년들과 함께 환경 운동에 앞장서온 그가 갑자기 왜 활동을 멈췄을까. 사정을 알아보니 그의 발길은 태안 앞바다에 보름째 갇혀 있었다. 자갈밭에 주저앉아 기름제거 작업에 여념 없는 이승우 씨, 인터뷰를 청할 틈조차 보이지 않자 기자도 일단 고무장갑을 끼고 그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기름찌꺼기들과 사투를 벌이기를 반나절. 몸이 피곤한 것은 그럭저럭 견디겠는데 지끈거리는 두통이 꽤 고역인지라 무심코 몇 마디 투덜댔더니, 여태 말 한자리 없던 이 씨가 그제야 돌아보며 한 소리 했다. ‘아무리 머리가 아파도 바다가 느끼는 고통만 하겠습니까?’
밀려드는 섭섭함에 다부진 말대꾸 한 토막 얹으려는데 등을 돌린 채 한사코 시선을 맞추지 않는 이씨. 날이 저물어 사람들이 모두 떠나가는데도 일어설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그였다.

WH 곧 해 떨어질 것 같은데 그만 일어설까요?

이 - 그러지 말고 조금만 더 수고 하십시다. 보름간 애썼는데 보시다시피 아직도 시커멓잖아요. 봉사자들이 계속 오고 있는데도 통솔하는 사람이 없다 보니 우왕좌왕 하다가 가는 사람들도 많고 능률이 좀 떨어지는군요. 사실 이 시간에 자리를 뜨면 안 됩니다. 퍼져 있던 기름띠들이 뭍으로 올라오는 시간인데…. 이 시간을 놓치면 기껏 밀려온 기름띠들이 다시 썰물 따라 휩쓸려 갑니다. 기름띠가 밀려오는 시간을 놓치지 말고 집중적으로 달라붙어야 하는데 정작 가장 중요한 순간에 모두 가버리니 답답하군요.

WH 항간에는 외국 방제 전문가들의 소견을 빙자해서 이제 그만 봉사활동을 멈춰도 된다는 얘기들도 떠돌고 있습니다. 갯벌과 모래를 사람들이 밟아댈수록 더 치명적이라는데….

이 -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들이 다녀간 곳은 피해지역의 일부일 뿐입니다. 아직도 방치된 채 사람들의 손길을 기다리는 섬들이 수십 군데가 있어요. 자원봉사자들이 자갈을 파내면서 원유를 떠 담고 있는 상황인데 기름 제거 작업을 끝내라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기름띠가 사라진 것은 순수한 호전현상이 아닙니다. 방제당국에서 엄청난 양의 유화제를 뿌려댄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유화제는 기름 덩어리를 미세한 입자로 만들어버립니다. 이게 바다 밑으로 침전돼 돌아다니면 더 치명적일 수 있어요.
이게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짓 밖에 더 됩니까. 유화 처리를 해버리면 육안으로 확인도 안 되고 흡착포를 사용할 수도 없어요. 양동이로 퍼 담던 어마어마한 기름 위로 유화제를 쏟아 붓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좀 더 많은 인력이 집중적으로 투입돼서 바다 오염과 유화제 남용을 최대한 막아야 해요. 잘잘못을 따질 사람들은 공정하고 치열하게 따지시고 자원봉사에 뜻이 있으신 분들은 최대한 능률적으로 움직여주셨음 합니다.
그리고 외국 전문가들의 쓸 만한 조언은 귀 담아 들어야 해요. 그들이 이곳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하니 정확한 진단 또한 어려울 것 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방제전문가들이니만큼 중요한 조언은 염두에 둬야죠. 갯벌을 밟는 것이 바다환경에 더욱 치명적이라고 한다면, 최대한 밟지 않고 기름을 걷어내는 방안을 강구해야 합니다. 알아보면 분명히 기름제거 도구 같은 것이 있을 텐데 당국의 대처가 아직도 미비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희망이 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을 좀 보세요. 한국 사람들의 투지와 인정은 참 못 말리겠습니다. 작업이 좀 더 효율적으로 이루어진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네요.

WH 기름제거 작업을 효율적으로 하려면 어떤 점에 신경 써야 할까요?

이 - 자원봉사자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각자의 준비물을 잘 챙겨오는 것입니다. 동호회나 카페를 통해 움직이는 분들은 공지사항을 잘 숙지하시고 단독으로 움직이는 분들은 정확히 어느 지점에서 봉사를 할 것인지 사전에 잘 알아보고 준비물을 챙기세요. 작업의 진전에 따라서 바가지 양동이 호미 작업복 등등 준비물의 구성이 약간씩 다릅니다. 물품 준비가 완벽히 돼 있는 곳과 그렇지 못한 곳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알아보고 움직이면 쓸모없는 물자 낭비를 줄일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작업장 내부를 통솔하는 인력이 좀 더 안정적으로 정비돼야 합니다.
일단 어른들이 해야 할 일과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을 구분해서 해야죠. 제가 보름간 작업해보니까 일하다가 목이 마르면 난감하거든요. 물통을 갖고 다녔었는데 고무장갑과 면장갑을 벗었다 꼈다 하려니 그게 너무 번거로웠어요. 그런데 그저께부터 초등학생 아이들이 생수병을 들고 다니면서 갈증 나는 사람들은 새끼 새처럼 입을 벌리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아이들이 계속 돌아다녀 주니까 일 하기가 훨씬 수월했어요. 기름 범벅된 고무장갑이며 마스크를 벗지 않아도 아이들이 목을 축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얼마나 능률적이에요? 쓰레기 분류 작업도 다시 쓸 수 있는 깨끗한 것들은 청소년들에게 시키고 무겁고 힘든 일은 어른들이 맡아야죠. 최전방 작업 전선에 투입할 인력에서부터 쓰레기 분류 수거를 할 만한 인력까지 자원봉사자들을 좀 더 효과적으로 배치해야 됩니다.

산더미 같은 쓰레기들을 한번 보세요. 하루 수천 명의 사람들이 다녀가면 수천 벌의 방제복이 버려지고, 수 천 켤레의 고무장화와 고무장갑, 마스크 비닐 옷이 버려져요. 비교적 깨끗한 것은 충분히 재활용을 할 수 있는데도 그걸 정리해서 다음 날 들어오는 사람들이 쓸 수 있게 배려하는 움직임이 활성화 돼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보니까 벗을 때까지만 해도 그리 기름 묻지 않은 깨끗한 것들이 쓰레기장에서 뒤엉키면서 아예 못 쓰게 되는 거죠. 그리고 뭣보다 큰 문제는 모두 당일치기로 다녀간다는 점입니다. 반나절 애쓰고 나서 그런대로 정리가 된 해변을 보며 사람들은 뿌듯해 하죠. 하지만 그들이 하나둘씩 돌아가는 저녁시간이면 물이 다시 듭니다. 기름띠도 다시 몰려들죠. 말짱 도루묵이 되는 상황이니…. 그 기름들이 다시 밖으로 나가기 전에 빨리 제거해야 되는데 그땐 이미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고 없어요. 그러니 사정이 허락 되는 분들은 1박을 생각하고 오신다면 더욱 좋겠습니다. 어두운 시간에도 작업을 할 수 있게끔 조명시설 지원이 가능하다면 더욱 좋겠고요.

WH 그렇게 하기에는 숙박 시설이 턱 없이 부족할 것 같은데요?

이 - 이 근처 여관 가보세요. 모두 텅텅 비었습니다. 기왕 돕는 거 일박 이일 정도로 해서 효율성을 좀 더 높였으면 좋겠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전에 왔다가 오후에 떠납니다. 환경단체 같은 곳에서 와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하지만 이런 식으로 연속성이 없다 보면 늘 새롭게 오는 사람들이 늘 새롭게 헤맨다는 문제점이 발생합니다. 저녁 만조 시간은 여섯시 이후인데 겨울이라 해가 빨리 떨어지니 사람들의 발목을 붙들기가 힘듭니다. 이런 내용을 방송이나 언론에서 많이 좀 퍼뜨려 주세요. 60만 명이 넘는 자원봉사자가 태안을 다녀갔는데 그 엄청난 인력을 최대한 활용하지 못했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WH 차편은 어떻게 이용해야 할까요?

이 - 중앙에서는 여러 단체의 움직임이 있고 방송언론의 참여도도 높은 편인데 지방 자치단체에서는 좀 소극적입니다. 자원봉사에 뜻이 있어도 차편이 마련되지 않아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오늘도 몇몇 단체에서 차량제공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자원봉사자들의 신청이 물밀 듯 하는데도 차량제공이 되지 않아 일손들이 발만 구르고 있다니 참으로 답답한 일입니다. 서울에서 이곳까지 걸어서 온 사람은 아마 저 밖에 없을 걸요. (웃음)
이 사태를 태안의 일이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우리 국토와 자연을 살리는 일이라 생각하고 다들 꾸준히 동참해 주셨으면 합니다. 기름 방제작업은 초기작업이 가장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기름의 휘발성 성분이 날아간 다음에는 그것이 바다 아래로 가라앉기 때문입니다. 기름이 땅 속에 스며들거나 썰물에 휩쓸려서 바다로 떠내려가면 치명적인 생태계 오염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바다가 아프면 인간도 어쩔 수 없이 같이 아파야 하는 이치인데도 남의 일인 양 딴청을 피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것이 가라앉아서 땅 속으로 스며들고 바다로 떠내려가기 전에 기름 제거 작업을 해야 합니다.
학생들이 만원씩 걷어서 빌린 차량으로 태안으로 향한다는데 그 모습들이 얼마나 대견합니까. 학생들에게 이는 참으로 큰 산교육이 될 것입니다. 성인들도 환경단체나 자원봉사 블로그를 통해서 함께 움직이면 일이만원 정도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힘을 모아서 태안을 살려봅시다.

객원기자 설은영 skrn77@joins.com

http://kfem.or.kr/ 환경운동연합 - 시민기자와 봉사자 모집

http://cafe.naver.com/greesea 태안반도 자원봉사 카페

http://www.taean.go.kr/ 태안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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