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레터] 약이 되는 ‘마구잡이 독서’ 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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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처음으로 재미있게 읽었던 책은 김종래의 『엄마 찾아 삼만리』라는 만화였던 것 같다. 상·하 두 권짜리로 두툼한 양장본이었다. ‘오늘도 추풍령 고갯마루에는 낙엽이 한 잎 두 잎 하염없이 떨어지고 있다’는 마지막 문장과 그 장면은 눈에 선히 남아있다. …중학생인 주제에도 누님이 헌책방에서 과월호를 헐값에 사서 보던 ‘여원’이나 ‘여상’같은 여성용 월간종합지를 화보에서부터 편집후기까지 죄다 독파함으로써 유명인사와 여러 글쟁이들의 이름을 익힐 수 있었다.”
 
소설가 김원우가 『내 인생의 글쓰기』(나남)에서 털어놓은 고백입니다. 안정효·신달자·도종환·김용택·안도현 등 9명의 시인·소설가들이 자신들을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한 책과 글쓰기에 대해 회고한 글을 모아놓은 책이지요. 만화로 시작해 여성잡지로 이어진 김원우의 독서이력은 잡지 ‘사상계’와 ‘현대문학’을 거쳐 소설·문학평론·전기·역사물·시·기행문·수필 등을 ‘닥치는 대로읽는 경지’에 도달합니다.

‘남독(濫讀)의 추억’은 그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교과서 이외의 책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 읽었다는 시인 김용택 역시 중학생 때 읽었던 책의 대부분이 만화책이었다지요. 또 한동안은 스스로 책을 선택하지 못하고 월부책 장사가 가져 오는 책을 읽는 시기를 거칩니다. 그 뒤로는 헌책방에 자루를 들고 나가 권 당 10원, 20원씩 하던 책을 한아름 담아와서는 코피가 나도록 샅샅이 읽었다는군요.
 약의 남용은 위험하지만, 책의 남독은 보약이 되나 봅니다. “날이면 날마다 자신 속에 자라고 있는 그 어떤 힘으로 늘 충만해지고 막강해졌다”는 게 남독의 시기를 돌아보는 김용택의 고백이니 말입니다.

수업일기 『천방지축 아이들, 도서실에서 놀다』(나라말)를 펴낸 중학교 국어교사 박경이도 같은 메시지를 전합니다. “‘덜 좋은 책’은 있어도 ‘나쁜 책’은 없으니 넉넉한 마음으로 아이들에게 ‘책 멍석’을 깔아주라”는 것이지요. “추천도서도 읽고, 재미있다고 소문난 책들도 읽고, 엉큼한 책들도 읽고, 판타지나 무협소설에 빠지기도 하는 동안 나름대로의 취향과 관심분야가 생기는 법”이란 게 교사경력 25년인 저자의 경험담입니다. 그런 만큼 서가에 얼마나 다양한 책이 꽂혀있는지가 중요하다는데, 개개인이 남독에 충분할 분량의 장서를 갖추는 건 쉽지 않은 일이겠지요. 올 한해 도서관 출입 횟수를 늘려야 하는 이유. 그래서 분명해집니다.

이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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