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은 왜 있고 재판은 뭣하러 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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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노무현 정부가 지난해 12월 31일 전격 단행한 특별사면에 대해 일선 판사들이 크게 반발하고 있다. 이번 특사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신건·임동원 전 국정원장 등 정치·경제·노동계 인사 75명이 혜택을 받았다.

 특히 판사들은 신건·임동원 전 국정원장이 사면된 것에 대해 가장 분개하고 있다. 두 사람은 항소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12월 27일 형이 확정된 지 불과 나흘 만에 사면복권됐다. 27일 상고장을 냈다가 2시간 만에 철회하는 해프닝도 벌였다. 법원 내에선 형이 확정돼야 사면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노리고 상고를 포기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이 사건을 맡았던 서울고법 이재홍 수석부장판사는 “내가 맡았던 형사사건 가운데 가장 고심했던 사건”이라고 밝혔다. 이어 “법리적인 것 이외에 국정원 직원의 증인 출석 여부만을 놓고도 몇 달을 씨름했는데 ‘법은 왜 있고 재판은 뭣 하러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판결문에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사면이 된 셈”이라며 “사면권을 남용하지 않겠다던 노무현 대통령이 임기 말에 결국 권력의 단맛은 다 빨아먹고 떠나는 셈”이라고 비난했다. 수도권 법원에 근무하는 한 판사는 “항소심 선고와 사면이 거의 동시에 이뤄진 셈인데 ‘너희들은 실컷 재판해 봐라, 나는 풀어준다’고 법원을 농락한 것 아니냐”고 했다.

 청와대가 2002년 대선 당시 ‘병풍’ 공작의 당사자인 김대업씨의 사면까지 검토했다는 사실도 판사들을 자극했다. 한 판사는 “임기 말이 아니었다면 (김대업씨 사면도) 그냥 밀어붙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사면 작업에 관여했던 법무부도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한 법무부 관계자는 “이번 특사는 청와대에서 다 주도한 것”이라며 “우리는 누구누구는 안 된다고 해서 결격사유가 있는 대상자를 뺀 것밖에 없다”고 말했다.

 사면권 남용에 대한 비판은 정권마다 있었다. 그러나 사면법은 광복 후 50년이 넘도록 한 번도 개정된 적이 없다. 어떤 대통령도 ‘특사의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사면심사위원회 설치를 골자로 하는 사면법개정안이 발효됐지만 대통령의 사면권 남용을 견제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하다는 평가다. 서울고법의 한 판사는 “법 질서를 수호해야 할 대통령이 정치적인 판단에 따라 범법자를 풀어주는 폐단은 없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박성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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