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4면

『이야기가 딴 데로 흘렀지만,「정읍사」의 달에도 두가지 뜻이담겨있는 게 아닐까요? 밤하늘에 돋는 달과 남자의 상징으로서의달.하늘에 뜬 달에게 호소한 것처럼 겉포장 하면서,실은 성애가(性愛歌)를 불렀을 수도 있다는 얘기죠.
아무튼 한마디씩 차근차근 추적해나가 봅시다.어떤 노래가 나타날지.』 서여사가 약탕관을 또 드는데 전화가 왔다.아리영이 건것이다. 두 분을 집으로 모시고 싶다는 아버지의 전갈이라 했다. 『내일 저녁? 그렇게 빨리?』 서여사는 수화기를 든 채 길례를 쳐다봤다.
요즘은 날마다 외출하는 꼴이다.가정주부인 터수에…하고 잠시 망설였지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어차피 남편은 한밤이 돼야 돌아올 것인데다,어미 손을 필요로 하는 나이의 아이들이 있는 것도 아니다.
『정여사도 괜찮으시다니 그럼 내일 뵙도록 하죠.아버님께 감사하다고 여쭤 주세요.』 아리영의 전화가 끝나자,이번엔 사업 관계 통화들이 잇따랐다.
『바쁘실텐데 저는 이만….』 일어서서 나오려는데 서여사가 앉으라고 손짓한다.관계 자료를 주겠다는 것이다.
김사장이 자료를 챙기러 나가고 서여사가 전화 보고를 받는 사이 길례는 동떨어진 생각에 빠졌다.흑갈색 약탕관이 먼 기억의 문을 열어젖힌 셈이다.
아버지의 대장간 뒷마당은 우물을 사이에 두고 한약방 마당과 통해 있었다.두 집에서 쓰는 공동 우물이다.수량도 넉넉하고 물맛도 좋았다.
우물가에 지어진 작은 목욕탕도 공용이었다.
후텁지근하던 어느 한나절,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목욕탕 문을 확 열었다.대야를 내다가 시원한 우물 물로 한바탕 세수할 작정이었다. 목욕탕 안엔 뜻밖에도 누가 서 있었다.
알몸의 남자.우람한 몸집이 한 눈에 들어왔다.한약방 집 총각이었다. 깜짝 놀라 쾅하고 문을 도로 닫았지만 약탕관 손잡이같은 발기가 눈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엄청나게 화가 났다.
문을 연 것은 길례 자신인데도 거꾸로 능욕당한 듯한 수치심이고교 삼학년짜리 소녀를 내내 화나게 만들었다.
「본다」는 우리말에는 외간 남녀가 「밀통한다」는 뜻도 있다.
보는 행위가 단순히 시각적인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길례는 나름대로 깨달았던가.
한약방 집 아주머니의 친정 동생이라는 그 총각을 아버지는 퍽마음에 들어했었다.눈썰미가 있고 힘도 좋은 데다 말수가 적어서대장간 풀무질이랑 잡일을 야무지고 묵묵히 거들어 주었다.그 날,목욕탕 문만 열지 않았던들 길례는 그와 결혼 했을지도 모른다. 인생은 이따금 미묘한 길갈피를 마련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