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오동 천년, 탄금 50년 41. 아이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1988년 찍은 가족사진. 앞줄 왼쪽부터 시계 반대방향으로 장녀 혜경, 필자, 아내 한말숙, 차남 원묵, 장남 준묵, 차녀 수경.

 “저는 앉아서 자는 게 더 편해요.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잠들어 버릇해서요.”
 나의 큰아들 준묵(고등과학원 수학부 교수)은 이런 아이다. 집사람이 수술을 받은 후 한동안 입원한 적이 있다. 나와 두 아들, 두 딸은 번갈아 가며 아내 곁을 지켰다. 준묵이 병실을 지키던 날 나는 미리 알리지 않고 아내에게 갔다. 아내는 자고 있었고 아들은 그 옆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었다.

 “보호자 침대에 누워서 좀 쉬거라”라고 말했지만 그 아이는 그냥 앉아서 자겠다고 하는 것이다. 준묵은 병실에 들어가면 먼저 옷을 편하게 갈아입은 후 밤새도록 책을 봤다. “병실 지키는 게 아주 편해요. 공부도 많이 할 수 있고.” 준묵은 이처럼 공부벌레다. 미국 하버드대에서 박사 과정에 다닐 때 나도 마침 객원교수로 1년간 그곳에 머물렀는데, 다른 학생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다. 모든 미국인이 놀거나 쉬는 추수감사절에도 혼자 학교 문을 열고 들어가 두문불출하며 공부만 했다. 의무감에서 했다면 이렇게 못했으리라. 이 아이는 취미가 공부다. 준묵의 삶은 공부와의 연애다.

 다른 세 아이도 모두 책 읽고 공부하기를 좋아했다. 아들 둘은 서울대 물리학과를, 딸 둘은 이화여대 사학과를 나온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둘째 딸 수경은 아직까지 공부를 하고 있다. 동국대 선학과 박사 과정을 밟는 중이다. 둘째 아들 원묵은 미국 텍사스 A&M대 생명공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사진 찍기를 좋아해 결혼할 때 처가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필요 없고 카메라만 사 달라”고 했으며, 대학생 땐 음대 작곡과 수업을 들을 정도로 취미가 다양한 아이다. 내게서 가야금도 배웠다. 정악과 산조 한바탕을 배웠고 직접 곡도 쓴다. 큰딸은 엄마의 영향을 받았는지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전공했고 모교에서 국문과 강사도 지냈지만 집안일을 하는 게 가장 좋다며 전업주부로 산다. 큰딸에게서 얻은 외손자 김호중은 초등학교 6학년인데 자기가 쓴 소설·시·수필을 모아 책을 내기까지 했다.

 아이들을 어떻게 키웠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우리 부부는 서로의 일에도 간섭을 않지만 아이들 크는 데도 간섭을 안 했다. 각자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도록 내버려뒀다. 큰아들은 물리학으로 시작해 수학이 더 좋다며 바꿨다. 둘째 아들이 음악을 취미로 삼고 등산에 푹 빠졌지만 우리 부부는 그냥 아이들 하는 대로 지켜만 봤다. 아이들이 모두 자기가 좋아하는 일과 연애를 하면서 살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다.

황병기<가야금 명인>

ADVERTISEMENT
ADVERTISEMENT